울주 천전리 서석이라는 돌맹이에 새긴 중고시대 신라 금석문을 분석하면 신라 법흥왕과 그의 동생 사부지 갈문왕徙夫智葛文王한테는 이들 형제의 여동생으로 어사추於史鄒라는 이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 돌맹이를 장식하는 무수한 글자와 문양 중에서도 법흥왕 시대에 작성 문서를 보면, 문제의 여인이 모습을 들이미는 것이다.
다만 문자 판독 여부에 따라 어사추於史鄒라는 대목은 다르게 읽힐 수도 있지만, 그가 법흥왕과 사부지 갈문왕 여동생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아무튼 우리한테 중요한 대목은 기존 문헌에서는 전연 존재를 알 수 없는 지증왕과 연제 부인 사이에 새로운 소생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는 점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보면 지증왕과 왕비 연제延帝 부인 사이 소생으로는 훗날의 법흥왕인 원종原宗과 진흥왕의 아버지인 입종立宗 두 형제만 등장한다. 이 입종이 천전리 서석 문서에서는 사부지徙夫智라는 이름으로 보인다.
아울러 조선시대 족보 관계 기록을 보면 이들 형제 외에도 진종眞宗이라 일컫는 형제가 한 명 더 있다고 한다. 이런 진종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유발하나, 이 문제를 다룬 신라사 연구자들은 대체로 그 존재를 받아들인다.
아무튼 1970년, 울주 골짜기에서 천전리 서석이 발견됨으로써 느닷없이 지증-연제 부인 사이에는 이들 두(혹은) 세 형제 말고도 어사추라는 딸내미가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렇다면 화랑세기는 어떤가?
법흥-입종-진종 세 형제 말고도 딸이 한 명 등장한다. 그 딸 이름을 화랑세기는 보현普賢이라 했다. 화랑세기에는 이들 셋 말고도 진종 또한 등장한다.
진종을 전군殿君이라 부르는데, 이는 후궁 소생 왕자나 출궁한 적통 왕자를 일컫는 칭호다. 따라서 진종을 전군이라 부른 까닭은 이미 이 당시 진종은 궁궐을 떠나 주소지를 옮긴 까닭이다.
아버지 지증도 죽고, 형 법흥도 죽으면서 조카인 진흥이 즉위하자 진종은 출궁出宮해서 전군으로 신분이 강등되지 않았나 한다.
보현은 말할 것도 없이 불교식 이름이라, 그의 원래 신라식 이름은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이 보현공주가 바로 어사추다.
(2015.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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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흥 입종 형제한테 여동생이 있었다는 사실은 오직 화랑세기에만 보인다. 그런 여동생이 다름 아닌 신라 법흥왕시대에 작성된 금석문에도 등장한다는 사실을 어찌 허심히 보겠는가?
지금 우리가 보는 화랑세기는 김대문 저술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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