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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평양을 능가하는 청천강변 대도회 안주

by taeshik.kim 2024.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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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자비 유배 출전인 황자黃梓(1689)~?)의 1734년 진주사행陳奏使行 기행록인 갑인연행록甲寅燕行錄을 보면 오가는 길목에 안주安州 라는 데를 모름지기 지나기 마련이라, 이곳은 청천강변이라, 나루가 모름지기 있기 마련이며, 나아가 바다에서 거리가 얼마되지 아니하는 까닭에 배가 들어왔을 곳이다. 

이런 데 도시가 형성되기 마련이어니와, 고려거란전쟁에서도 중요한 무대로 등장하는 곳이기도 하다. 

고려는 거란과 압록강을 경계로 설정하기는 했지만, 일단 그것이 뚫리면 1차 방어선이 청천강이라, 이 청천강을 지켜야 서경을 보호하게 된다. 

고려시대 안주가 어떤 면모였는지 증언이 많지 않아 아쉽기 짝이 없거니와, 그로부터서 훨씬 시대를 내려와 조선시대 증언을 보면 그곳이 점거하는 위치를 가늠케 하는 대목이 적지 않으니, 당장 저 갑인연행록을 봐도 그러하다. 

7월 2일 왕한테 잘 댕기오겠소 하고 떠난 황자는 그달 16일 기축에 안주에 닿는다. 이날 날씨는 쾌청했다. 






동틀 무렵 밥을 먹고 출발하였다. 고을 사또가 와서 잠시 만나 이야기하였다. 운암雲岩에 이르러 말을 갈아타고 길가에서 잠시 쉬다가 즉시 출발하였다.

안주安州에 도착해보니 성과 관청 누대들이 평양에 버금갔다. 백성들의 집은 외성〔郭〕 바깥쪽에 붙어 있었고 저잣거리는 길 양쪽에 벌어져있어 평양보다 더욱 번화한 듯 보였다.

평양은 민가들이 성 안으로 들어와 대사臺榭 사이에 있지만 안주는 민가들이 성문 밖 먼 들판에 노출되어 있으며, 또 평양은 아침저녁에만 저자가 열리는데 안주는 하루 종일 상점들이 열리므로, 겉으로 보기에 이 때문에 번화해 보이는 듯했다.

청남문淸南門으로 들어가 자전루紫電樓에 여장을 풀었다. 누각 높이가 몇 장이나 되어 넓고 시원하게 트인 것이 더위를 잊을 만하였다. 우후虞候 박건朴鍵, 병사兵使, 고을 사또〔本倅 유시모〕 및 두 차사원이 와서 만났다.

고을 사또가 어제 숙천에 도착했을 때, 지금이 때마침 가을 7월 16일이니 청천강淸川江에서 뱃놀이를 하자고 부사와 약속하고 나도 함께할 의향이 있는지를 물었다. 내가 기제사가 가깝다는 이유로 사양했는데도, 이제 다시 와서 안타깝고 아쉽다고 말하기에 나 또한 건성으로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병사兵使가 또 백상루에서 전별연을 연다면서 내일 전별자리에서 보자고 하기에, 나는 고을 사또에게 답한 말과 똑같이 대답하였다.
가산 군수嘉山郡守 김형로金亨魯, 귀성 부사龜城府使 구희具僖, 곽산 군수郭山郡守 성치적成致績, 운산 군수雲山郡守 □□□, 개천 군수价川郡守 □□□, 전 영변 부사寧邊府使 정수송鄭壽松이 와서 만나보았다.

희천凞川에 정배定配된 장오복張五福이라는 자가 자칭 이조 서리吏曹書吏라면서 계단에서 절을 했는데 물어보고 나서야 그러한 사실을 알았다. 놀라움을 금치 못하여 본 군의 좌수座首, 공형公兄, 형리刑吏들의 목에 칼을 씌워 잡아오도록 시켰으니, 이는 잘못을 다스리려는 생각에서였다.

요 사이 도로가 진창이라서 길을 가기 힘든데다 배가 살살 아프면서 설사가 나올듯한 증세〔裡急 아랫배가 아프면서 설사나 변이 나올 듯이 급한 증세〕까지 있어서 이질痢疾이 될까 두려우니, 이 근심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부사가 와서 보고는 문병하고 갔다. 파발을 보낼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편지를 써서 부쳤다. 정사가 저녁에 배를 타러 가면서 부리는 관동官僮을 보내서 갈 것인지 말 것인지를 묻기에 병으로 인해 따라갈 수 없다고 답하여 보냈다.

한밤중에 홀로 높은 누각에 기대어 앉아 달빛을 따라 자리를 옮겼는데, 숲의 안개와 마을의 연기에 성 안팎이 잠겨있는 모습이 실로 으뜸가는 풍경임을 깨달았다. 청천강에서 유람했다면 어찌 이만큼 조용하게 있을 수 있었겠는가! 황상黃裳이 와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밤늦게 돌아갔다. 자전루에서 잤다. 오늘 60리를 갔다.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서한석 (역) | 2015
 
왜 고려 또한 이곳 안주를 그리 중시했으며 특히 강감찬이 제3차 고려거란전쟁에서 이곳에다 본진을 두고 방어막을 쳤는지 이 증언을 보면 간접 유추한다.

저 증언에서 또 하나 유의할 점은 유배생활을 하는 사람에 대한 처우이니, 앞서 황자는 같은 유배생활을 하는 신처우는 찾아가 노닥노닥이며 놀기까지 했는데,

같은 유배생활을 하는 장오복은 외려 곤장으로 다스리려 했으니, 물론 사정은 차이가 있으니, 함부로 장오복이 유배지를 이탈했다는 혐의와 더불어, 청탁하러 왔다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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