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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마질차] (5) 신목태후의 등장, 싹트는 반란의 씨앗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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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 마크가 바로 신목태후였다.



이에 앞서 소명태자昭明太子가 무열제武烈帝의 명으로 흠운欽運의 딸을 아내로 맞기로 약속했으나 일찍 죽으니 흠운의 딸은 스스로 소명제주昭明祭主가 되고자 하니 자의후慈儀后가 허락하니 이가 곧 소명궁昭明宮이다. (정명政明) 태자와 더불어 모후母后가 자주 소명궁으로 거둥하니 태자가 소명궁을 좋아하여 마침내 이공전군理恭殿君을 낳았다. (이에) 후后가 소명궁에게 명하여 동궁東宮으로 들어가게 하고 선명궁善明宮으로 이름을 바꾸니 총애함이 흠돌의 딸보다 크기 흠돌의 딸이 투기를 했다. 


화랑세기 제32세 풍월주 신공信功 전에 보이는 이 구절이야말로 곧이어 펼쳐질 일대 피비린내나는 내전을 예고하는 암시다. 

당시 왕실 권력구도를 보면 이미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죽고 없는 가운데 가장 큰 어른으로 그의 정비이면서 김유신과 김흠순 형제 누이인 문명태후文明太后, 곧 문희文姬가 정중앙을 정좌한 가운데,

그의 아들 문무왕 김법민과 그의 정비 자의태후慈儀太后가 양날개에 포진했으며, 태자 정명政明, 곧 훗날의 신문왕은 이제 청년이 되기 시작했고 흠돌欽突의 딸을 정부인으로 맞아들인 시점이었다. 

다만 이제 권력추가 새로운 권력으로 이동하는 징후가 뚜렷이 감지되기 시작했으니, 문명태후와 문무왕 모자는 이제 세월의 무게를 짓누를 길이 없어 죽음을 피하지 못했으니, 이제 왕실 권력 중심추는 급격히 자의태후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권력투쟁 한복판에서 은인자중하며 살아남은 자의태후는 이제 문명태후를 대신해 권력 중심추가 되었으니, 이 권력 중심추 또한 얼마 지나니 않아서 다른 데로 옮아가는데, 그가 바로 소명궁昭明宮으로 일컬다가 훗날 선명궁善明宮으로 일컫게 된 김흠운의 딸이었다. 

이 여인을 일러 소명궁 혹은 선명궁이라 했지만, 이것이 그가 거처하는 왕궁 건물채 이름이기는 했지만, 더욱 정확히는 그 궁궐 건물채 주인이라 궁주宮主였다. 

아버지 김흠운金欽運이 655년 조천성 전투에서 장렬했지만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고서 애비 없는 자식이 된 이 딸 또한 조숙했던 듯, 스스로 살 길 개척에 나서 실로 절묘한 수법으로 자신을 노리개로만 간주하려는 뭇 남성 유혹을 벗어났으니, 그것이 바로 본래 정혼자였던 소명태자의 영혼을 지키는 재궁齋宮이 되는 길이었다. 

재궁이 무엇인지 여러 번 설명했거니와, 간단히 말해서 귀신집 사당을 지키는 여성이다. 귀신을 섬겨야 하는 까닭에 순결해야 하며, 그래서 미혼이어야 했다. 

이런 행동거지를 눈여겨 본 이가 바로 문무왕비 자의慈儀였다. 맞이를 일찍 잃은 슬픔을 애매 아닌 사람이 어찌 감당하겠는가? 허망하게 간 그런 아들의 영혼을 위로하며 극락왕생을 비는 사당 소명궁에 자주 행차할 수밖에 없었으니, 이럴 때마다 이 어미는 자주 둘째 정명政明을 데리고 갔다. 

한데 이 정명이 보기에 형이 죽지 않았으면 형수가 되었을 이 여인이 못내 마음에 들었다.

태자의 권력을 이용해 결국 그를 정복하고는 마침내 임신까지 하게 하고 그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아들까지 낳았으니, 실상 이런 애정 행각은 자의태후 묵인이 있었던 것이다. 

이리 되면서 더는 재궁으로 남을 수는 없었다. 자의태후가 이제 내 아들 귀신집 관리는 다른 사람한테 맡기고 너는 동궁으로 들어가 태자를 섬기라 하면서 동궁 별채 하나를 내어주었는데, 거기다가 선명궁善明宮이라는 간판을 달아줬다. 

이 선명궁은 후궁 처소였다. 왜? 당시 태자 김정명金政明한테는 조강지처가 따로 있었던 까닭이다. 

한데 이 조강지처가 문제였다. 아니 문제가 아니라 살겠다는 본능이 발동했다. 자신은 아들도 없는데 떡 하니 후궁이 먼저 아들을 낳아 집안으로 기어들어오니, 어찌 이것이 위험신호 아니겠는가?

화랑세기는 시종 이 흠돌의 딸과 그의 아버지 흠돌이 빌미가 되어 반란이 일어났으며, 그런 반란을 일으킨 일당은 천하의 쳐죽일 놈들이라 그렸지만, 천만에. 그건 본능이었고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패했을 뿐이다. 

역사는 이를 김흠돌의 반란이라 부른다. 

애초 이야기 줄기에서 너무 멀어져 버렸는데, 이 단계에서 이미 죽은 지 한참이나 지난 김흠운, 곧 장래 조강지처를 내몰고 조만간 신문왕의 조강지처 자리를 꿰차는 그의 딸이  바로 신목태후神穆太后다.

진흥왕 섭정기 지소태후, 진평왕 섭정기 만호태후에 버금하는 권력의 화신 그 신목태후 말이다. 

이 신목 태후는 700년 6월 1일 사망하는데, 화랑세기 어디에도 신목이라는 언급이 없다. 왜? 신목은 죽은 뒤에 받은 존귀한 이름이라, 김대문이 화랑세기를 완성하는 시점에 그녀는 살아있었고 최고 권력이었으니 신목이라는 이름이 있을 수가 없다. 

화랑세기는 신목태후가 살아있을 적에 완성되어 그에게 진찬進撰되었다. 그러니 그 권력 중심으로 급격히 역사는 조작되었고 이 역사 조작의 총대를 맨 어용사가가 김대문이었다.

김대문 가문은 신목태후에 붙어 살아남았다. 그의 역사 조작에 김유신 가문이 희생되었다. 김유신의 유훈통치가 끝나가는 시점이었다.

이때 억울한 김유신이 귀신이 되어 미추왕을 찾아가 흐느낀 일이 발생한다.

이 신목태후랑 아버지가 같은 오빠 혹은 동생이 바로 마질차다. 둘은 엄마가 달랐다. 

바로 이 다른 엄마한테서 훗날 새로운 역사가 생겨난다. 원성왕이라는 위대한 왕이 출현하고, 이를 발판으로 후대 신라는 이 원성왕을 뿌리로 삼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간다.

이 원성왕한테는 김유신의 피가 흘렀다. 그랬다. 원성왕은 김유신의 후손이었다. 이른바 신김씨新金씨가 태동하는 순간이었다.

역사? 아주 재미 있다. 다시 김유신시대가 펼쳐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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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질차] (4) 형수가 되었을 여인을 노리는 시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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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질차] (4) 형수가 되었을 여인을 노리는 시동생

그때 태손太孫 소명전군昭明殿君이 이미 태어난 상태였고, 무열제는 (며느리인) 자의慈儀의 현숙함을 매우 아꼈다. (27세 흠돌欽突 전) 그때란 26세 풍월주인 진공이 흠돌한테 풍월주 자리를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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