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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THESIS

초거대 사찰 옆에 있어 억울한 미탄사, 누군가 저택을 희사했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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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탄사味呑寺라는 사찰은 꼴랑 한 번 모습을 들이밀고는 영원히 사라지고 만다. 것도 역사상 저명한 인물을 소개하는 자리에 곁다리로 잠깐 고개를 들이밀었다가 말이다.

삼국유사 권1, 기이紀異 1편, 신라시조 혁거세왕 이야기에 이르기를

‘최치원은 본피부 사람이다. 지금 황룡사 남쪽 미탄사 남쪽에 [그가 살던 집] 옛 터가 있다. 이것이 최후崔候(최 문창후-최치원)의 옛집이 분명하다.’

이것이 전부다. 실제 미탄사 자리가 어딘지는 실상 오리무중이었다. 다만, 황룡사 남쪽이라 했고, 또 그 남쪽 인접 지점 드넓은 경주평야 한가운데 누가 봐도 신라시대 흔적인 삼층석탑이 우람하게 있어 이곳이 미탄사 터일 것이라는 심증만 있었다. 
 

사진 잘못 찍거나 엉뚱한 사진 배포했다. 북쪽 황룡사와 그 북쪽 분황사까지 나와야 한다!!! 황룡사를 짤라 묻따.

 
 
그런 심증은 이후 이 일대에 진행한 발굴조사를 통해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포착됨으로써 이제 미탄사지는 이곳이다 안심해도 좋은 단계에 이르렀다.

2014년 중요 폐사지 시·발굴조사 사업에서 조계종단이 만든 조사기관이라 해서 이런 쪽 발굴조사는 도리질을 치는 불교문화재연구소가 이곳을 뒤지다가 ‘미탄(味呑)’이라는 글자가 적힌 기와를 발견한 것이다.

이에 문화재청이 이곳저곳 관련 기관에서 갹출해 만든 조직 신라왕경핵심유적복원‧정비 추진단이란 데가 있어 이곳을 중심으로 신라왕경 핵심유적을 우리가 복원정비해 보겠다 하고는 그 사업 중 하나로 찔끔찔끔이 아닌 제대로 한 번 이제는 파보자 해서 2018년 이래 진짜로 미탄사 터 일대를 파제끼기 시작했다.

물론 조사는 여전히 불교문화재연구소가 했다. 왜? 저기 안 주면 조계종에서 난리를 칠 것이 뻔하므로.

그 발굴성과를 이 장마비 내리치는 계절에 내일 오후 2시 현장에서 공개하겠다고 해서 기자님들을 불렀다.

현장은 혹 모르는 사람 계실 터이므로 내비  경북 경주시 구황동 441번지 찍고 가면 허허벌판에다 내려다 준다. 하도 우리네 문화재 정비가 좋아서 주변엔 나무 한 그루 없다!!! 비 그치면 짱짱 자외선 내리 쬐니 감안하시라. 

글타면 조사성과는 어떤가? 
 
뭐 짜더라 각종 도판 첨부해서 보도자료 뿌렸는데, 아래가 전부다. 
 

 
뭐 복잡한 거 같지만 암것도 아니다. 한데 저 도면에서 조심해야 할 대목이 있다. 

금당이라고 추정한 곳과 삼층석탑 중심선이 안 맞는다!!! 저런 석탑은 금당과 세트라서 으레 금당 앞마당 한가운데, 그리고 금당 전면 딱 중앙지점을 차지해야 한다. 

왜인가? 금당은 부처님을 모시는 공간이요, 부처 중에서도 살아있음을 상정하는 공간인데 견주어 탑파는 그 사후를 추념하는 산소인 까닭이다. 그래서 둘은 항상 세트이며 그래서 그 세트임을 표시하고자 저런 방식으로 배열한다. 
 

금당지라고. 음...양태 보니 금당 맞는 거 같다.

 
한데 이건 안 맞는다!!! 발굴을 제대로 못했거나(그러면 난리칠 테고), 뭔가 사연이 있다. 금당이랑 석탑이 만든 시기가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더 따라가 보자. 

암튼 이번 조사 결과를 종합해 하는 말이

‘미탄사’는 8세기 후반 기존 황룡사지(이 표현 오류다. 어찌 황룡사지 남쪽에다 만들었는가? 황룡사 남쪽에다 만든 것이다. 얼이 빠지면 저런 식으로 쓴다.) 남쪽 신라방 내 가옥에서 사찰로 전환되어 13세기까지 운영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면서 또 하는 말이 

사역은 신라왕경 방리제坊里制 안에서 방내도로로 구획된 곳에 세로 약 160m, 가로 약 75m, 면적 12,000㎡로, 삼층석탑과 금당지를 비롯한 여러 동의 부속 건물과 원지(園池, 정원 안에 있는 연못), 담장, 우물, 배수로 등이 갖춰져 있었다.

사찰 영역은 삼층석탑과 금당으로 구성된 예불 공간, 승려들이 거주하는 승방과 부속 건물 등으로 구성된 생활공간, 그리고 원지 일원의 후원공간으로 나눠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저런 설명 어디에서도 미탄사 만의 특별함이라 할 만한 구석은 없다. 다른 데 절터를 파도 다 저렇다. 

한데 다음 말이 조금 이채롭다. 앞에서 내가 저 도면 보고 뱉은 의문이 그대로 표출한다. 

특히 미탄사는 추정 문지-탑-금당이 남북으로 배치되었는데 금당이 탑의 중심축선상에 벗어나 있어 전형적인 신라왕경 내 사찰과는 다른 형태의 가람배치를 보인다. 이는 8세기 이후 신라왕경의 도시가람으로 지어진 귀족층의 원찰願刹로 추정된다는 점에서 통일신라시대 왕경 사찰 연구에 있어 학술적 의미가 크다.

눈치 챘나? 기술이 빌빌 꼬였다는 점을? 저런 식으로 기술할 수는 없다. 왜? 비문법적이기 때문이다. 저 정신을 살려 내가 보도자료 쓴다면 이리 했을 것이다. 
 
특히 미탄사는 추정 문지-탑-금당이 남북으로 배치되었는데 금당이 탑의 중심축선상에 벗어나 있어 전형적인 신라왕경 내 사찰은 물론 여타 다른 사찰의 그것과도 다른 형태의 가람배치를 보인다. 이는 아마도 애초부터 이곳을 사찰로 만들고자 해서가 아니라, 기존 이곳에 있던 가옥(혹은 구조)을 최대한 살려 사찰로 바꾼 데서 일어난 현상으로 짐작된다. 

만약 이런 추정이 사실이라면 통일신라시대 왕경 사찰 탄생에서 새로운 사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한국 고대사에서는 그러한 사례라 명확히 보이지는 않지만, 동시대 중국과 일본만 해도 자기 저택이나 별장을 희사해서 절로 만들었다는 기록이 부지기로 확인된다. 
 

이거이 연못 추청 구역이라고. 오른쪽은 대로변이라, 그걸 테두리로 썼음을 본다.

 
이번 조사에서 드러난 연못은 약 33×28m, 약 900㎡ 규모로 금당 터 북서쪽에 위치한다. 이곳으로 물이 흘러들어가는 시설은 동쪽 남북대로大路에서 찾았다. 이 연못은 그 테두리가 직선과 곡선호안이 혼용한다.

연구소에 의하면 호안 동벽과 북벽은 강돌을 여러 단 쌓아 직선으로 만들었고 서벽과 남벽은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곡선으로 만든 것으로 추정된댄다.(하도 비문이 많아 그대로 인용을 못한다!!!)
(통일)신라시대 원지는 안압지 동궁, 구황동, 용강동 등지에서 확인된 적이 있다. 
 

현재의 삼층석탑. 저게 통신 중반이지 말기? 어떤 놈이?

 
또한, 기존 나말여초(신라 말기~고려 초기) 석탑으로 여겨지던 ‘경주 미탄사지 삼층석탑’의 하부 지정층을 조사한 결과 석탑이 8세기 후반에 건립되었음을 새롭게 확인하였다.

잉? 이건 무슨 소리? 딱 봐도 통일신라시대 전성기더만 누가 이리 추정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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