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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촬영에 심혈을 기울이고 고혈을 짜낸 김제 벽골제 발굴현장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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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발굴현장 중에 강렬하게 남은 데가 많지만, 개중 이 김제 벽골제 발굴 역시 빼놓을 수 없다. 물론 내가 직접 본 데가 아무래도 그렇지 아니하는 데보다 더 강렬할 수밖에 없겠지만, 이건 내가 그 촬영에 나름으로는 심혈에 심혈을 기울 데라 더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다. 

현장 공개 당일 서울에서 현장으로 날아간 나는 보통 내 일하는 스타일이 관련 기사는 미리 쓰고 현장을 가니, 이날도 이리했다고 기억하거니와, 그런 까닭에 나는 비교적 느긋하게 현장을 음미하면서, 또, 그런 까닭에 더 느긋이 이 현장을 어떤 방식으로 기록에 남길 것인지를 고민하게 되거니와, 막상 현장을 마주하고선 진짜로 잘 담고 싶었다. 

그만큼 벽골제 현장은 나한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당시 나는 현장 사진을 흑백과 컬러 두 가지로 번갈아 가며 사용했으니, 요새야, 또 그때도 일단 컬러로 촬영하고는 포토샵으로 흑백 처리하면 되었지만, 이 현장은 그러고지 싶지는 아니했다. 

 

이런 식으로 촬영을 해 봤다.

 
 
이 현장은 조사단장인 최완규 선생이 무척이나 흥분했다고 기억하거니와, 하긴 뭐 이 양반 특성이야 모든 자기가 관여하는 현장을 가장 중요한 고고학 현장으로 만드는 신이한 능력이 있는 분이라, 벽골제라 해서 유별나다 할 수는 없겠지만, 이날은 그런 기운이 더했다고 기억한다. 

왜 그리 할 수밖에 없었느냐 하면, 아래 첨부 기사에서 드러나듯이 이곳에서 초낭草囊이라 해서, 이른바 제방 같은 것을 쌓을 적에 가마니떼기를 활용한 흙뭉치 쌓기 기법이 처음으로 확인된 까닭이었다. 이것이 아마 국내 최초였으리라 기억한다. 

 

흑백으로 담아 본 현장

 
직후 이런 기법은 성림문화재연구원이 조사한 경주 남산 기슭 도당동토성에서도 확인한 것으로 기억한다. 

다만, 최완규 선생한테는 이 벽골제에 관한 한 치명적 아킬레스 건이 있었다. 이 벽골제는 내가 암만 봐도 저수지가 아니라 해안 방파제다. 다시 말해 육지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막아 활용하기 위한 시설이 아니라, 바다에서 밀려드는 바닷물을 막기 위해 쌓은 제방이다. 

당시 벽골제를 두고 그 논쟁이 치열할 때였으니, 저 논쟁에서 최 선생은 줄곧 저수지 제방이라는 설을 선두에 서서 주장하던 터였으며, 그런 주장을 굽힐 리 없었다. 연구자의 고집이라고도 할 수 있겠고, 그것을 양보하는 순간, 자신의 가오 일부가 무너진다는 그런 자존심 문제도 없지는 않았을 터다. 

저 아래 첨부 기사를 보면, 이 대목을 아주 미묘하게 내가 만들어 넣은 구절이 있다. 나로선 약을 좀 올리고 싶었지만 가오 봐서 참았다는 말을 해둔다.

객설이 좀 길었다. 당시 내가 쓴 기사를 전재하면서, 군데군데 당시 내가 촬영한 사진들을 끼워넣기로 한다.  

 

확실히 이럴 때는 흑백으로 촬영해야 이상한 맛이 난다.

 
 
2015.02.12 11:00:30
벽골제서 신라 원성왕때 제방보강 진흙주머니 발굴
한반도 최초 원형 발견…제방 성토층 하부서 다수 드러나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김제 벽골제에서 신라 원성왕 무렵 제방 보강을 위해 진흙을 담아 쌓은 주머니인 초낭(草囊) 흔적이 발견됐다. 이런 제방시설이 온전하게 확인되기는 한반도에서는 처음이다.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전북문화재연구원(이사장 최완규)은 한반도 최고(最古)·최대(最大) 수리시설로 알려진 벽골제에 대해 올해 용골마을 지역에서 발굴조사를 벌인 결과 제방 동쪽 부분에서 보축(補築) 제방 시설을 확인했다고 12일 밝혔다. 

특히 이 보축 제방 성토층(흙다짐층) 하부에서는 초낭이 다수 드러났다. 

 

뒤태 딱 보니 박세웅이다. 문화재계, 특히 그 활용사업에서 독특한 위상을 지니는 친구다. 원광대를 나왔으며, 그래서 최완규 선생을 아주 깎듯이 모신다.

 
 
초낭은 일본 카메이 유적(7~8세기) 등지에서 확인된 적이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원형이 온전한 형태로 발견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남서-북동 방향으로 열을 맞추어 배치된 초낭은 연약한 지반을 견고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됐다. 

조사단은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 결과를 보면 7세기 전후 통일신라시대에 이들 초낭을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고 덧붙였다. 

삼국사기를 보면 원성왕 6년(790)에 전주 등 7개 주(州) 사람들에게 벽골제를 증·수축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초낭은 이때의 시설로 보인다고 연구소는 밝혔다. 

 

요로케도 찍어봤다.

 
초낭에서는 흙과 함께 볍씨, 복숭아씨가 출토됐다. 또 그 아래층에서는 담수(淡水) 지표종(指標種)이면서 한해살이 물풀인 마름이 발견돼 벽골제가 과거 담수지(淡水池)였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고 연구소는 덧붙였다. 

이런 발표는 벽골제가 저수지가 아니라 해수가 흘러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해안방파제라는 최근 학계 일각의 주장을 염두에 둔 것이다. 결국 벽골제는 저수지이지 방파제는 아니라는 암시다. 

이번 조사 결과 확인한 보축 제방은 길이 약 75m, 너비 약 34m이고, 성토층 최대 잔존 높이는 160㎝였다. 남서-북동 방향으로 좁고 기다란 띠 모양(帶狀)을 이루며 진행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사람도 잔뜩 넣어봤다.

 
나아가 단면 토층은 약 140~300㎝ 간격으로 성분이 다른 토양이 '之'자 모양으로 맞물려 쌓인 양상을 띤다.

제방 가장 아랫부분인 기저부基底部 조사 결과 제방은 직선으로 연결되었고 일부 경사면에서 목주열(木柱列, 나무기둥열)이 놓여 있다는 사실이 다시금 확인됐다. 

목주열은 2열이 연속성을 보이며, 성토된 제방을 더 견고히 하거나 보호하기 위한 시설로 조사단은 판단했다. 

제방 기저부 최대 너비는 27.67m로 조사됐지만 일부 확인되지 못한 구간을 감안하면 제방 너비는 약 30m 안팎으로 추정됐다.

 

가마니 흔적이 완연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기저부 너비가 21m로 나타나지만 조사 결과 드러난 규모는 더 커서 지점별로 다른 너비로 축조했을 가능성도 높은 것으로 보인다.
taeshik@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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