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가 활동한 19세기 전반의 학술수준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2층 <추사의 생애실> 중 <추사의 인장> 코너 앞에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는 아호雅號도 많이 썼지만, 인장 또한 많이 사용했습니다.
심정인審定印은 서화 작품의 감정에 사용되는 인장입니다. 이 가운데 여기 보시는 <정희교독正喜校讀>은 ‘김정희가 교정보고 읽은 책’에, <정희독본正喜讀本>은 자신이 읽은 책에 찍은 인장입니다. 그러니까 개념적으로 명확히 구분되는 것이죠.
이것이 고증학의 본질입니다. 아는 것은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추사가 활동한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까지의 학술 수준을 오늘날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거의 근대 과학 수준에 육박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을 갖게된 것은 상명대 교수로 갑골학자인 김경일 교수가 쓴 『한자의 역사를 따라 걷다』(바다출판사, 2005, 12,000원)라는 책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이 책, 아주 재미있게 읽은, 읽어볼 만한 책입니다.)
근대는 과학의 시대입니다. 과학이 아니면 근대에서는 취급하지 않습니다. 인문과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예술과학 등등.
그럼, 과학科學은 무엇인가? 증명된 것을 말합니다. 증명되지 않은 무엇을 증명하려면 설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가설假說이라고 합니다. 이른바 썰(說, 이바구)입니다. 가설이 증명된 것을 과학이라고 합니다.
그럼 증명되지 않은 것을 믿는 것은? 예, 미신迷信이라고 합니다. 심한 경우 종교적으로는 맹신盲信에 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19세기 동아시아의 학술적 수준은 당대에 증명할 수 있는 최대한을 논증하고자 한 것, 이른바 청나라의 고증학(考證學), 조선의 북학(北學, 또는 實學), 일본의 난학蘭學은 이러한 근대적 과학의 수준에 거의 육박하였다고 하겠습니다.
추사가 북한산 진흥왕순수비의 판독과 관련하여 2번이나 산에 올라 탁본을 뜨고, 삼국사기/삼국유사 등의 역사서와 대조 검토함으로써 연대를 추정하는 자료가 친구 조인영에게 보낸 편지(이 편지는 특히 ‘북한산비고北漢山碑攷’라는 별칭으로 더 잘 알려짐, 추사박물관 소장, 2층 상설전시실 전시 중)입니다.
그래서 월북한 고고학자 도유호都宥浩(1905~1982)가 1961년에 쓴 한국 최초의 고고학개설서 『조선원시고고학』에는 “한국의 고고학은 추사 김정희로부터 시작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고고학자 이선복이 쓴 짧은 글 「추사와 뇌부」라는 글도 참고됩니다.
이상, 어제 경기지역사연구소 동료들에게 들려준 추사박물관의 전시해설 일부를 적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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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쓴 허홍범 선생은 추사박물관 학예연구사로 추사 전문가다.
현재 과천 추사박물관에서 후지츠카와 난학이라는 주제의 특별전이 열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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