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곧 하는 이야기지만, 동아시아 세계에서는 생일이 없었다. 당 현종 때 와서야 비로소 우리가 아는 해피 버스데이 happy birthday가 탄생했으니, 그런 가운데서도 그 이전에 굳이 기념일로서의 생일이라 할 만한 것이 없지는 아니했으니, 대표적인 것이 부처 탄생일인 초파일과 노자 탄신일로 설정한 5월 5일이 그것이었다.
이 둘은 종교적 관념에서 생일을 기념한 것이어니와, 그럼에도 훗날 동아시아 세계에서 생일이 탄생하는 밑거름 중 하나가 됐을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해도 좋다.
어떻든 이 생일이라는 관념이 동아시아 세계에서 어찌 탄생하게 되었는지는 내 주된 관심이어니와, 태어난 날을 기념해 매년 그날마다 케이크에다가 촛불 꽂아놓고 친지와 더불어 그것을 기념하는 의미에서는 생일은 당 현종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자치통감 당기 29 현종 개원開元 17년(729) 8월 조에 이르기를, 이달 계미일(5)이 황상의 생일이라 해서 화악루花萼樓 아래서 백관들에게 연회를 베풀었으니, 좌승상 원건요源乾曜와 우승상 장열張說이 백관을 거느리고 표문을 올려 해마다 8월 5일을 천추절千秋節로 정하고 천하에 널리 알려 모두가 잔치를 벌이고 즐기게 하자고 요청하니, 얼마 지나지 않아 社를 옮겨 천추절과 합쳤다 했거니와. 사社란 토지신을 제사하는 명절이니 이날은 무일戊日에 거행됐던 것인데, 합쳐서 천추절로 삼은 것이다.
이때가 바로 동아시아 세계에서 생일이 탄생하는 시점이니, 같은 자치통감을 훑어가면 이후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는 기사가 즐비하게 뒤를 따른다.
곧 당기 권 제30 현종 개원 24년(736) 조를 보면, 이해 가을 8월 임자일(5)은 천추절이어서 여러 신하가 모두 보석을 붙인 거울을 바치니 장구령은 거울을 가지고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은 사람이 자신을 비춰서 길흉을 보는 것이라 생각하고 이에 이전 시대에 일어나고 망한 근원을 저술하여 책 5권을 만들고는 그 책을 천추금경록千秋金鏡錄이라 하여 그것을 올리니 황상이 그 책이 훌륭하다는 편지를 써서 하사했다 고 한다.
이어 당기 32 천보天寶 10년 신묘辛卯(751)에는 "봄 정월..갑신甲辰(20일)은 안녹산祿山 생일生日이라, 황제가 귀비貴妃가 의복衣服과 보기寶器, 술과 음식을 내리니 그 내린 것이 매우 많았다 고 하거니와, 이는 이미 생일이 황제를 벗어나 신하들에게까지 퍼진 양상을 증언한다.
당기 권 제38 숙종 상원上元 2년(761) 9월 조를 보면, 이달 갑신일(3일)은 천성지평절天成地平節이라 해서 황상이 궁궐 안 세 전각에 도량을 설치하고 궁인을 불보살로 삼고 무사를 금강신왕으로 삼아 대신들을 불러 둘러싸고 막배하게 했다고 하니, 이날은 숙종 생일이라, 그는 예종 경운 2년(711) 9월 3일 출생이다. 이미 이 무렵이면 황제마다 생일을 부르는 명칭을 달리하기 시작했음을 본다.
당기 40 대종 대력 원년(766) 겨울 10월 을미일(13)을 보면, 이날 역시 황상 생일이라 해서 여러 도道 절도사가 금과 비단 그릇과 의복 진귀한 놀이개 준마를 올려 장수를 기원하니 다 합한 가치가 민전으로 24만에 달했다고 한다. 이를 보고는 신하 상곤이 간하기를 "절도사는 남자가 밭 갈고 여자가 길쌈하는 것 같은 직책이 아니니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서 빼앗은 것입니다. 원한을 거두어들여 아첨을 구하니 잘했다 할 수 없습니다. 청하건대 이를 물리치소서" 하니 황상이 듣지 않았다고 한다. 이미 생일이 부패 환락으로 연결되기 시작했다는 징조다.
이어 당기 42 덕종 건중 원년(780) 4월에는 대종 시대에 매년 정월 초하루와 동지, 단오, 그리고 황제 생일마다 주부州府에서는 일상적으로 내는 부세 말고도 다투어 공물을 올리니, 공물 바치는 것이 많으면 이를 기뻐하니 무장과 간악한 관리들은 이를 기회로 아래 백성들을 침범하여 약탈했다고 한다. 이달 계축일(19)은 황상 생일이라 사방에서 공물을 올렸으나 모두 받지 않았다. 이정기李正己와 전열田悅이 각각 겸 3만필을 올리니 황상이 이를 탁지로 돌려보내면서 조부를 대신하는 것으로 했다고 한다. 덕종은 현종 천보 원년(742) 4월 19일 생이지만 이날을 명절로 삼지 않으려 했다. 그럼에도 대종 이래로 오대까지 정월 초하루 동지 단오 황제 생일은 사절진봉四節進奉이라 해서 주부州府에서 공물을 올렸다.
이렇게 해서 생일은 현종 시대에 비로소 탄생하더니, 이어 그것이 사치와 연결되기 시작했고, 이내 신하들에게도 번져 절일로 기념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발명된 생일이 이제는 누구나 기념하는 시대를 맞았다. 돌이켜 보면 이 생일 때문에 얼마나 많은 분란이 생겼고, 돌이켜 보면 이 생일 때문에 끊어질 듯한 인연이 기적으로 맺어졌으며, 또 돌이켜 보면 이 생일 때문에 얼마나 많은 부끄러움이 탄생했던가?
잊어 먹으면 잊어먹었다 해서, 기억하면 잘 기억해서 기특하다 해서, 너 생일 아니냐고 하면 네가 그걸 알아서 무엇하냐고도 해서 이래저래 생일은 분란이고, 이래저래 생일은 축복이고, 이래저래 생일은 쪽팔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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