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이맘쯤이면 익어가다 수구리는 나락이 펼치는 장대한 풍경 무대를 일컬어 평야平野라 하거니와
이 풍경은 놀랍게도 수리조합의 선물이다. 따라서 그 대부분은 식민지 시대 이후에나 가능한 풍경이다.
우리가 아는 평야 대부분은 실상 근대의 무자비한 침탈이 초래한 풍광이다.
이는 무엇으로 증명하는가? 첫째 기록이 그렇고 둘째 고고학 발굴이 증명하니, 전형적인 평야라는 곳 제아무리 파제껴봐라 단 한 곳에서도 농경 흔적 없고 사람이 디딘 흔적 없다.
그렇다면 고려 조선시대 대지주는 어떤 사람을 말하는가?
평야라기에는 쪽팔리기 짝이 없는 계곡간 논밭을 말할 뿐이다.
우리가 지금 평야라고 부르는 곳은 농사를 지을 수가 없는 불모지였다.
왜? 비가 조금만 왔다하면 침수되는 까닭에 누구도 그곳을 개간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만경평야? 나주평야? 김포평야? 웃기는 소리다. 그 평야는 백년 전에야 비로소 탄생 징조를 보이기 시작했으니
이런 땅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잡풀 우거진 갈대 억새밭에 지나지 않았다.
호남이 곡창지대라는 말은 전근대에도 해당하는 말이지만 그 곡창지대가 지금의 평야를 말한다 생각하면 오산이라 실상 그 계곡간 땅과 침수위협에서 상대적으로 안전한 구릉을 말할 뿐이었다.
우리가 아는 평야를 농경지 등으로 활용하기 위한 절대 조건은 물의 통제, 곧 수리水利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제방을 쌓고 댐이나 보 혹은 저수지를 막아야 한다. 삼한시대 이래 곳곳에 포진하는 저수지는 실상 그 아래 구릉 논을 경작하기 위한 어린아해 장난 같은 물통제 시스템이라 그것이 홍수를 어찌 막는단 말인가?
냇가에 위치하는 평야가 쓰임이 있기 위한 절대의 조건은 범람으로부터의 안전확보라 이를 위해 단순히 제방 건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강바닥을 준설해야 했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고작 청계천이나 가끔 준설할 뿐이라
당시 토목 수준으로 무슨 한강 금강 낙동강 영산강을 준설한단 말인가?
지금의 평야는 황무지에 지나지 않았다.
이 평범성조차 그 흔한 농업사 역사학도 고고학도 누구도 지적하지 않는다는 게 신통방통하더라.
결론한다.
수리조합은 혁명이다. 단군조선이래 이런 농업혁명은 없었다.
평야? 아무리 파봐라 조선시대 이전 농경지 나오는지. 나오면 내 열손가락 장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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