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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당탕 서현이의 문화유산 답사기

폭설이 선사한 정릉 원찰 흥천사의 절경

by 서현99 2024.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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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에 정릉동에 살았다지만, 4-5살 정도로 어린 나이였기에 당시의 기억은 거의 나지 않는다. 
 
정릉동에서 꽃병공장을 했던 우리집은 함께 일하는 삼촌들이 많았다.

엄마는 당시 매일 공장 식구들 삼시세끼 밥해먹이느라 고생했다고 그때 얘기를 할 때마다, 아리랑시장을 걸어서 장을 보러 다녔다는 말을 자주 하셨다.

아마도 우리집은 아리랑고개 언덕 어디쯤에 있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정릉동에서 삼양동으로 이사온 이후, 그리고 용인으로 자리를 옮기기 전까지 쭉 삼양동에 살았는데,

삼양동과 정릉동은 비교적 가까워서 마음으로는 한동네라고 생각하지만, 생활반경이 달라 자세히 돌아본 적이 없다. 

물론  '정릉'이 있고, 그 원찰인 '흥천사'가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가까운 곳은 발길이 잘 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드디어 흥천사를 가게 된 날이, 많은 날 중에 하필이면, 2023년의 마지막 폭설이 내린 12월 30일이었다.



흥천사(興天寺) 는 북한산(삼각산)의 남쪽 끝자락에 자리한 조선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의 원찰이다.

https://maps.app.goo.gl/wiJH7BXAb6DH9sXCA?g_st=ic

대한불교조계종 흥천사 · 4.5★(17) · 불교사찰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 흥천사길 29

maps.google.com


원래 1397년(태조 6)  지금의 덕수궁 자리인 황화방에 세워졌다 조선후기에 신덕왕후의 추봉과 더불어 다시 지금의 자리에 중창되었고,

19세기 왕실의 지원으로 여러 전각의 중수와 불사를 통해 그 면모가 일신되었다고 한다.

우선 흥천사를 본 첫 느낌은 도심 속에 이렇게나 사찰이 잘 남아 있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이었다. 반듯한 계단과 석축, 넓은 주차장 등등..



그리고 뒤로 늘어선 아파트를 보며, 아파트 숲 속에 섬처럼 남아 있는 모습이 용인 심곡서원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여기뿐만 아니라 도심 속 모든 문화유산의 숙명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날은 하얀 눈 속에 묻힌 흥천사를 보느라 아파트가 눈에 잘 들어오진 않았다.)




지금은 규모가 크지 않지만, 대방, 극락보전, 명부전 등의 건축물과 흥천사 42수 금동천수관음보살좌상, 흥천사 목조여래좌상, 흥천사 목조보살좌상, 아미타불도, 비로자나삼신괘불도 등 왕실의 후원으로 지은 사찰답게 건축물뿐만 아니라 불상, 불화 등 수준 높은 유물이 매우 많은 사찰이다. 

(유물에 대한 설명과 논문은 여러 자료들이 있으니 여기서는 자세한 설명은 하지않고, 눈 오는 풍경 사진 위주로 올리고 간단히 덧붙이고자 한다.)

흥천사 대방은 홍선대원군의 발원으로 1865년에 중창되었으며, 2013년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되었다.

 

불교건축에서 대방은 대중방의 의미이며, 사찰 내 스님들이 한 공간에서 좌선, 설법, 공양 등을 함께 할 수 있는 규모가 큰 건물이다.



주불전인 극락보전의 전면에 위치한 대방은 H자 형태의 독특한 평면 구조를 보이는 건축물로,  

조선시대 말, 염불 수행과 다목적 공간의 필요에 따라 사찰의 여러 기능을 통합 수용하여 실용성과 합리성을 추구했던 그 시대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흥천사 대방



극락보전은 흥천사의 주불전으로  철종 4년(1853)에 구봉 계장(九峰啓壯) 스님이 건축하였다.

흥천사 극락보전



이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로 정면의 3칸 창호는 매우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흥천사 극락보전



극락보전 정면 창호(오른쪽 칸)

 

극락보전 정면 창호 꽃창살
극락보전 왼쪽칸 꽃창살




또한 다포계 건축물인데 후면의 가운데 칸에는 포를 생략하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일반적으로 건축물 후면에 포가 생략되는 것을 정면성을 강조하고 경제적인 요인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이 건물은 의도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극락보전 좌측면,
정면과 후면의 초석 모양이 다른 것도 특징이다.

 

포가 생략된 공간에는 백의관음을, 그 아래에는 반야용선을 그려 넣었는데, 이날따라 흩날리는 눈발과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부전은 철종 6년(1855)에 순기(舜猉)스님이 세웠으며, 고종 31년(1894)에 중수되었다.

흥천사 명부전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인데, 명부전 현판이 세로로 되어 있는데 고종의 친필이라고 한다.



정면은 다포계인데 후면은 이익공으로 되어 있고,

보통은 정면 가운데 기둥 위에만 용이 장식되는 것과 달리 정면 4개 기둥 모두 용이 장식되어 있어, 매우 신경쓴 건물임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원찰이기때문에, 명부전에 좀 더 공을들여 지은 것이 아닌가 한다.

흥천사 명부전



갑진년, 청룡의 해와 잘 어울린다.



기둥의 이런 장식도 궁궐건축적 요소이다.

 

 

명부전 내부, 일반적인 불전의 닫집이 아니라 궁궐 닫집과 같다.



극락보전과 마찬가지로 후면 가운데 칸에는 반야용선 그림이 그려져 있다.

명부전 후면 반야용선, 후면은 이익공으로 정면과 달리 기둥 사이에 포가 생략되고 장식화되었다.

 

극락보전과 명부전 사이에 있는 석불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 하얗게 변해버린 흥천사를 보면서,

이 근처에 오래 살았던 나는 왜 오늘에서야 흥천사를 왔을까하는 생각과,

한편으로는 폭설이 선사한 아름다운 흥천사를 오늘이 아니면 또 언제 볼까하는 생각에, 오늘 나를 여기로 이끈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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