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어김없이 영감이 지하철 숙대역입구 5번 출구에서 나온다. 내가 김천에서 도착하는 시간 때문에 여느 일요일보다는 대략 두 시간 정도 늦은 오후 2시쯤 접선했다. 해방촌을 둘러보자 했으니, 뚜벅뚜벅 숙대역입구를 출발해 오른편 미군부대 담벼락을 끼고는 용산고 방면으로 걸어간다. 이 길을 따라 그대로 직전해 남산 능선 중 하나가 용산으로 흘러내린 언덕배기를 향해 곧장 침투하기로 한다.
US GOVERNMENT PROPERTY...저 말은 대한민국 주권이 미치지 아니하는 구역이라는 뜻이다. 대한민국이되 대한민국이 아닌 땅이다. 그런 곳에서 군 생활을 한 나는 언제나 주한미군부대 담벼락에 붙은 저 말이 그리 거슬리곤 한다. 범죄자가 도망치다 저 담벼락을 넘으면 잡아가지도 못한다. 누구던가? 시집인지 소설인지 제목을 붙이기를 "이태원에 뜨는 달은 미국 달인가?"라 했거니와, 그래 맞다, 이 미군부대에 뜨는 달은 달조차 미국 달이다.
저 앞에 용산중·고등학교가 나타난다. 그 고등학교 정문 밖에는 이곳이 이태원터[梨泰院址]임을 알려주는 돌덩이 안내판이 덩그레하다. 그에 이르기를 "조선시대 일반 길손이 머물 수 있던 서을 근교 네 숙소[四院]의 한 곳"이라 한다. 글쎄 틀림없이 이에서 유래했을 이태원이라면, 정작 저 남산 너머 한남동 쪽인데, 그 이름이 좋다해서인지 저쪽에서 가져가버렸을까.
해방촌(解放村)...이름이 요상하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이 길을 안내한 골목답사 전문가 김란기 박사는 껄껄 웃으면서 "80년대 같으면야 해방촌이라면 해방신학을 떠올렸을 거야" 한다. 하지만 해방촌은 행정구역이 아닌 까닭에 그 분포 범위를 정확히 확정할 수는 없다.
위키백과 '해방촌(解放村)'이라는 표제 항목을 보니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2가동의 대부분과 용산1가동의 일부가 포함되는 지역으로 용산고등학교의 동쪽, 남산타워의 남쪽, 곧 남산 밑의 언덕에 형성된 마을이다. 1945년 광복과 함께 해외에서 돌아온 사람들과 또 북쪽에서 월남한 사람들,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인해 피난을 온 사람들이 정착하게 되어 해방촌이라 불리게 되었다. 해방촌 밑으로는 남산 2, 3호 터널이 지난다"고 하거니와, 다른 지명 혹은 백과사전도 이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해방촌은 말 그대로 1945년 일본 식민지배에서 한국이 해방된 직후 "해외에서 온 동포들이 이 부근 산기슭에 임시 거주처를 마련하고 살게 된 데서 유래됨"이라 하는데, 그보다는 그 직후 전개된 남북 분단 및 한국전쟁과 밀접한 듯하다. 이 해방촌 일대에는 북한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집중 거주했다는데, 이런 사정은 누구보다 내 장모님이 잘 기억한다. 남영동에서 반세기 이상을 터전으로 삼은 장모님에 의하면, 이 동네에는 북한 사람들이 거주하면서 주로 동대문시장이나 남대문시장에서 장사를 했다고 한다. 그런 사람 중에 돈을 번 사람들은 떠났다고 한다.
이 해방촌은 남산 능선을 온통 차지하는 까닭에 차로라고 해 봐야, 숙대역에서 그 능선을 관통해 그 반대편 이태원 쪽으로 넘어가는 꼬부랑길 하나밖에 없고, 나머지는 가파른 골목길이다. 이곳은 형성기에도 그랬을 테지만,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도 달동네다.
21세기 최첨단을 걷는다는 서울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한 소위 저개발 지역이다. 얼마 전에 눈이 온 모양이라 곳곳이 그 흔적이 남았거니와, 눈이 한창 쌓일 적에는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도 힘들 법하다. 이럴 땐 어쩌냐 물었더니, 이 주변에서 살기도 한 김란기 박사 전언에 의하면 "눈은 철저히 치운다"고 귀띰한다. 하긴 그러지 않고서는 눈이 녹을 때까지 동네는 마비될 수밖에 없다.
지금 한국 영화계를 주름잡는 최민식과 한석규 출세작이 <서울의 달>인데, 시골에서 상경한 이들이 정착한 곳이 서울 어느 달동네였거니와, 혹 촬영지가 이 일대 아닌가 하는 느낌까지 주는데 어떤지 모르겠다. 최민식은 언제나 체육복을 걸치고 딸딸이를 질질 끌고 다녔고, 그 촌냄새 없애려는 한석규는 그리 좋다 따라다니는 오연수 싫다고 도망다닌 기억이 있다. 그리 싫다 하니 오연수는 손지창 품에 안기고 말았나 보다.
그 역사 만만찮은 용산고는 왜 강남으로 옮기지 않았는지 궁금하거니와, 그에 더불어 이 역사 깊은 학교가 그런 풍모 완연한 초창기 건물 한 채 왜 남기지 않았는지도 못내 의뭉스럽기만 하다. 한국전쟁에 다 망가지고 말았는지, 아니면, 이후 언제인가 몽땅 신식 건물로 뜯어고쳤는지 알 수는 없지만, 100년을 헤아리는 이 학교에 그 100년을 느낄 만한 구석은 어디에서도 찾기는 힘들다.
그런 아쉬움은 그 교정 도로 건너편 주차장이 그런대로 풀어준다.
태림주차장이라는 곳. 여느 평범한 사립주차장일 법한 이곳을 들어서면 이상 야릇한 건축물 하나가 나타난다. 공중에 붕뜬 이상한 건물채가 말이다. 앙상한 철골조 네 개에 의지한 공중부양이다.
주차장 업주가 묘한 골동품 애호가적인 풍모가 있어, 설치미술 작품으로 저리했을까? 김란기 박사에 의하면, 이곳이 바로 식민지시대 용산고 교장 사택 자리로 추정한다고 한다. 그 자신도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이것이 바로 그 사택 흔적일 것이라고 한다. 이전 답사 때 이곳 주차 관리인이 그리 말하더란다. 나아가 김 박사에 의하면 저번까지만 해도 좀 더 많은 부분이 남았는데 오늘 보니 보존 면적이 줄어들었다 한다. 내력을 조사해서 만약 그런 추정이 맞다면 보존조치를 당국이 강구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이를 뒤로 하고 고개를 오르기 시작하는 문턱에 이른바 108계단이란 것이 나타난다. 근처에 사는 나는 이 계단을 오르내린 적 없는 듯한데, 혹 있을지도 모르겠다.
실제 계단 숫자가 108개인지 내가 확인은 못했지만 얼추 그 정도임은 분명하다. 한데 그 계단 중앙을 관통해 승강기가 오르내린다. 얼마전에 서울시인가에서 이 일대 주민 편의 차원에서 설치했단다. 보니 운행 중이다. 공짜로 운항한다. 그렇다면 이 계단 정체는 무엇일까?
저 계단 위에는 식민지시대 말기에 호국신사(護國神社)가 있었단다. 야스쿠니신사 같은 그런 성격의 신사 말이다. 저 계단은 호국신사를 오르내린 계단이란다. 그런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가, 어떤 일본인 연구자가 그런 역사 내력을 조사한 결과를 발표하면서 이 계단이 유명해졌다고 한다. 아마 이 근처 지금의 안중근기념관에 있던 조선신궁과도 모종의 세트와도 같은 경관을 형성했을 것이다. 이 호국신사에 대해서는 내가 제대로 조사하지 못했다.
그런 역사적 내력을 고려할 적에 저 계단은 보존조치가 철저히 강구되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다만, 장모님이 이르기를 "얼마전에 승강기 설치했다데. 그 동네 할마시를 미용실에서 만났는데 좋다 하더라고" 하니, 이곳 주민들한테 주는 편의를 고려할 때 단순히 역사 흔적 보존을 빌미로 삼은 원형 보존 주장이 쉽지는 않았을 법하다.
저 계단 오르니 언뜻 봐도 왜색 짙은 폐가 비슷한 건물이 나타난다. 김란기 박사는 이곳이 바로 신사가 있던 자리라 하는데, 해방과 더불어 신사가 없어지면서, 특히 남북 분단 무렵에는 주로 평북 선천에서 내려온 북한 사람들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고 하거니와, 저 건물은 그 초창기에 지었을 것으로 짐작했다. "해방이 되긴 했지만, 그때 집은 다 일본식이었으니깐..."
그 인근에 묘한 납짝이 건물이 보인다. 김 박사는 이를 "협소주택"이라 한다든가 했는데, 암튼 저 좁은 기슭 땅에다가 저리 납딱하면서 길쭉하게, 그리고 높게 저리 지었으니, 대체 저 내부는 어떤 모습일까 못내 궁금하다. 불가사의하다.
이 해방촌 만데이에는 신흥시장이라는 전통재래시장이 있다. 나는 이런 데 이런 시장이 있는 줄 몰랐다. 그 앞을 수십 번은 지났는데도 말이다. 장모님 역시 이 시장은 있는지도, 가 보신 적도 없단다. 그 이유를 알 만했다. 시장이라고 하기엔 규모가 아주 작다.
한데 이 시장 골목이 근자 도시재생 사업인지 뭔지에 힘입어 천지개벽하는 중이다. 하드웨어는 흐름하기 짝이 없으나, 그 골목 곳곳에 자리잡은 가게들은 내부가 하나 같이 젊은이 감각에 맞은 공간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 옛날 풍모를 채 잃지 않은 다음과 같은 곳도 있다.
나로선 이 오락실이 흥미로웠는데 보니, 그 옛날 오락게임이다. 저들 오락게임기가 그 옛날 것 그대로인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복고열풍을 비즈니스에 접목하고자 하는 사업주 작품 같다. 갤라그 한 게임 때리려 했으나, 망가진 허리에 나중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해방촌은 이렇게 과거와 현재가 착목하는 미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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