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북방과 시베리아에 대한 관심을 초원에 대한 열망이라고 본다. 그래서 걸핏하면 우리는 알타이 민족의 시원을 찾는답시며 바이칼 호수로 향하는지도 모르겠다. 마찬가지로 서역 혹은 실크로드에 대한 관심은 사막과 오아시스에 대한 열망의 표출이라고 본다. 초원과 사막은 한국 문화권에는 없다. 그래서일까? 그런 우리에게 각인한 유목과 사막은 진취와 광활, 야성, 그리고 원시의 표상이다. 사막과 초원을 터전으로 삼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강인하다는 이미지로 우리는 각인했다. 그들이 실제로 그러한지 아닌지는 관심 없다. 아니 알 필요도 없다. 그들은 늘 그러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표상들로써 우리는 우리가 그리는 사막과 초원에서 우리의 억눌린 욕구를 분출하려 했는지도, 혹 하려는지도 모른다. 중국에는 늘 사대를 일삼았다는 자괴감, 이 한반도는 좁아터진 땅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왜소함에 대한 자각이 외부로의 ‘진출’을 갈망하며, 그에서 사막과 초원과 그리고 그 둘을 아우르는 서역 혹은 실크로드를 욕망했는지도 모른다.
피안(彼岸)은 언제나 달콤한 법이다. 거기엔 늘 판타지가 펼쳐지기 마련이다. 혹여 우리가 그리는 북방, 우리가 상상하는 서역은 그런 곳이 아닌가? 명사산에서 낙타를 타면서, 그리고 저 드넓은 몽골고원을 거닐다가 가끔 마주치는 한적한 양떼와 말떼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우리는 언제까지나 그곳에서 터 잡은 이들은 낙타와 말을 타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네들 역시 자동차를 갈망하며, 비행기를 선망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 역시 코카콜라를 즐기고, 위성 안테나를 달지 못해 안달복달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거기엔 우리가 꿈꾸는 낭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와 똑같은 협잡과 암투와 시기가 있지 않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가 그리는 실크로드는 그러한 잡된 것들이 없어야 한다는 믿음이 있다.
*** 2016년 나는 모 학회 발표를 의뢰받고는 이리 써 나갔다. 하지만 그 글은 완성을 보지 못했으니, 그 무렵 나는 당시 우리 공장 적폐경영진한테서 해고 통보를 받았다. 내가 학회 발표를 빵꾸 낸 처음이자 마지막이어니와, 그래서 언제나 빚이 있다.
이 글에서 나는 일본 소설 《돈황》이 한국에 미친 영향까지 다룰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이 소설을 읽고는 실제 실크로드학 투신을 결심한 어떤 분 인터뷰까지 완료한 상태였다. 나왔더래면 대작大作이 되었을 것이라고 상상해 본다.
왜?
나는 대작 아니면 쓰지 아니하니깐.
어쩌겠는가? 사산死産할 운명일 수밖에 없었나 보다고 자위해 본다.
사산이 어디 글 뿐이랴?
사산한 이들을 위해 법등 하나 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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