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는 전반적으로 디테일 측면에서 일본보다 많이 떨어진다.
예를 들어본다.
일본 중세의 경제주체간 관계를 그린 구조다.
공령과 장원과의 관계, 그리고 재지영주와 부재영주와의 관계가 정확히 그려져 있다.
문제는 이것이 단순한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는 데 있다.
우리는 이 정도로 디테일 있게 동시기 경제구조를 그려내지 못한다.
일차적으로 사료의 한계 때문일 수도 있고,
이런 이야기는 그렇지만 양국간 학문의 수준차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건 문제는,
우리는 저렇게 디테일 있게 나와야 할 정보가 없기 때문에,
호족이라던가, 군인이라던가, 신진사대부라는 이름으로 퉁쳐서 설명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수천년간을 항상 똑같은 갈등 구조만 있었던 것으로 역사가 읽힌다.
실제로 수면 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전혀 파악이 안 되는데,
거기다가 한반도 수천년 역사에서 수도 없이 있었던 침략과 응전사를
민족주의와 범벅해서 함께 더해서 쓴 것, 이것도 문제다.
민족주의와 도전과 응전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그것이 결코 역사기술의 주역으로 올라올 수는 없다.
외침만큼,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내부의 발전 동력이고 디테일인데,
우리는 디테일이 떨어진 상태에서 외침과 응전의 기술이 너무 많다 보니
항상 똑같은 갈등구조에 정기적으로 외침 때문에 고생한 기술이 수천년간 이어진 것으로 읽힌다.
이런 역사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란 없다.
그냥 쳐들어오면 쫒아내야 한다는 교훈 뿐.
그것이 작금의 한국사이다.
일본사와 한국사가 매우 다르게 읽히는 가장 근본적 이유이다.
'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번주말: 찐밥=強飯을 먹어보려 함 (0) | 2023.11.07 |
---|---|
헤이안시대 귀족의 식사 (0) | 2023.11.07 |
제사를 중단할 수 있는 자 (0) | 2023.11.04 |
신라는 왜 일본의 견당사를 죽도록 방해했을까 (0) | 2023.11.04 |
불교의례의 쇠퇴와 제사 (0) | 2023.11.0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