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같은 아마추어의 이야기가
역사의 거대시각에는 유용할 때가 있을 것이다.
숲에 들어간 사람들은 산을 못보는 법이다.
여산진면목이라 했지 않나.
한국사와 일본사는
처음부터 같은 농경사회를 포맷하고 시작했기 때문에
따지고 보면 고분시대-아스카 시대까지는
한국사회를 복붙한 것이 일본사회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달라졌을까?
우리는 이를 심상하게 봐서는 안된다.
신채호가 조선역사상 이천년래 대사건이라 하고
묘청의 난을 들었지만
사실 이와는 다른 의미에서 중요한 사건이 한국사에는 있었는데
우리는 전시과체제와 과전법 체제를 신왕조가 수립한 후
문란해진 토지제도를 정비한 사건으로 간단히 처리하고 넘어가는 경향이 있는데
이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닌 듯 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사전이 광범하게 퍼진 것을
일거에 공전으로 돌려버린다는 것인데
이는 북한에서 장마당 경제를 취소하고 배급으로 돌아간다는 것과 같은 것이니
그 충격파가 적을 수도,
역사적 의미가 미미할 수도 없는 사건이라는 뜻이다.
전시과 체제와 과전법 체제의 수립이
원인일지 아니면 또 다른 원인의 결과일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 사회가 토지의 공적 소유가 붕괴하고
사적 소유가 발전하기 시작할 때
사회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전혀 다른 선택을 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한국은 왜 끝끝내 공적 소유의 복구에 집착했을까?
물론 이러한 집착은 일본도 헤이안 시대 말,
장원정리령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났지만
실제로 이 주장이 그 사회에 구현하는 것은 결국 실패했다.
공전을 복구하는 것이 이론만으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사회에 구현되었다는 것은
이를 요구하는 니즈가 있었다는 이야기니,
그것이 무엇인가.
필자는 결국 그 이유를 외침이라고 본다.
한반도에 몰려드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외침.
이것이 한국사와 일본사의 전개를 갈랐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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