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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한국사 열쇄를 쥔 함경북도 단천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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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천은 이 지도에서 보다시피 동해안을 걸치는 북한 동쪽 해안선 딱 중간 위치를 점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행정구역으로는 함경남도에 속한다.

단천을 端川이라 쓰는 내력이 있겠지만 잘 알 수는 없다.

이 단천은 조선전기만 해도 확실히 조선땅이라 하기 힘든 야만의 땅이었다.

조선 세종 시대 전국 지방 사정을 정리한 세종실록지리지는 단천을 이리 정리한다.


◎ 단천군(端川郡)
지군사(知郡事)가 1인이니, 길주도 좌익 병마(吉州道左翼兵馬)를 겸한다.

오랫동안 호인(胡人)에게 점거(占據)되었었는데, 별호(別號)를 두을외(豆乙外)라 하고, 또는 독로올(禿魯兀)이라고도 한다.

고려 대장(大將) 윤관(尹瓘)이 호인(胡人)을 몰아내고 9성(九城)을 설치하여, 복주 방어사(福州防禦使)로 삼았다가, 우왕(禑王) 8년 임술 【홍무(洪武) 15년.】 단주 안무사(端州按撫使)로 고쳤다.


본조 태조 7년 무인에 지단주군사(知端州郡事)로 고쳤다가, 태종(太宗) 13년 계사에 예에 따라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이로써 보면 고려 말에는 확실히 단천이라는 지명이 있었고 그 지점이 지금의 단천 일대임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실록은 이곳이 본래 여진 땅이었다가 윤관이 구성을 개척하면서 고려 판도에 들어온 것으로 본다. 그 북쪽 다른 성들이 이내 함락당한 데 견주어 단천은 아마도 당시 국경과 가까운 지점이라 해서, 특히 아래에서 보듯이 이곳만은 지켜야 하는 필연성이 있어 끝까지 고려가 자기 수중에 묶어두려 했으며 이 유산을 조선왕조는 그대로 물려받았음을 본다.

이어 지리지는 산천 경내 특징을 소개한다. 


도덕산(道德山) 【군의 북쪽에 있는데, 본군 사람들이 진산(鎭山)으로 삼는다.】

이판 대령(伊板大嶺) 【군의 동북쪽에 있으며, 지금은 마천령(磨天嶺)이라고 일컫는다. 야인(野人)들이 소[牛]를 ‘이판(伊板)’이라고 이른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송아지를 팔았더니, 그 어미소가 송아지를 찾아서 이 고개를 넘었다. 그 소 주인이 그 발자국을 좇아 간 것이 길이 되었다.】

두을외 대령(豆乙外大嶺) 【군의 남쪽에 있는데, 지금은 마운령(磨雲嶺)이라 일컫는다. 두 영(嶺)이 모두 요충지(要衝地)이다.】

파독천(波獨川) 【군의 동쪽에 있다. 그 근원이 갑산(甲山) 지경의 쌍청동(雙靑洞) 북쪽 큰 산 아래에서 시작하여 채금동(採金洞)을 지나, 군치(郡治) 2백 40여 리를 경유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이마이천(泥亇耳川) 【군의 북쪽에 있다. 그 근원은 갑산(甲山) 지경의 쌍청동(雙靑洞) 큰 산 아래에서 시작하여 덕응주(德應州) 산성(山城)을 지나서 20여 리를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위의 두 내는 모두 어량(魚梁)이 있는데, 주로 연어(連魚)가 난다.】
 
산과 고개, 그리고 하천을 정리한 것이다. 파독천은 순간 피천득으로 읽었다.

이 대목에서 유의할 대목은 이판대령伊板大嶺이라는 이름으로 보이는 마천령磨天嶺과 두을외대령豆乙外大嶺이라는 이름으로 보이는 마운령磨雲嶺이다.

이 둘을 일컬어 요충이라 지적한다. 딴 곳은 잃어도 이곳만은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이 두 고개는 이 무렵까지만 해도 이쪽과 저쪽,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선이었다. 
 
이어 지리지는 단천 지리를 개술한다.


지방 경계는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기 35리, 서쪽으로 북청(北靑) 이동현(梨洞峴)에 이르기 90리, 남쪽으로 북청 다보현(多甫峴)에 이르기 75리, 북쪽으로 길주(吉州) 두일리(豆日里)의 오을족현(吾乙足峴)에 이르기 1백 80리이다.

호수가 8백 32호요, 인구가 2천 7백 31명이다. 군정은 익속군(翼屬軍)이 3백 20명, 수성군(守城軍)이 24명이다.

성(姓)이 2이니, 심(沈)ㆍ김(金)이다. 【모두 삼척(三陟)에서 왔다.】


이 대목이 꽤 중요한데 이곳으로 이주한 사람들 원적지가 삼척이란 사실이 그것이다.

강제 이주도 있을 테고 자발도 있으리라 본다. 배타고 갔을 가능성이 크다.

나아가 이 무렵이면 함경북도까지 이미 개척했을 때라 단천은 이미 식민화가 착근하기 시작했음을 본다.


이어 지리지는 농경지 현황을 정리한다. 


간전(墾田)이 9천 2백 77결이요, 【논은 겨우 3백 34결이다.】 토의(土宜)는 오곡이다.

토공(土貢)은 금ㆍ곰가죽ㆍ아양사슴가죽ㆍ삵가죽ㆍ여우가죽ㆍ사슴뿔ㆍ잇[紅花]ㆍ지초이요, 약재는 곰쓸개[熊膽]ㆍ사향(麝香)ㆍ안식향(安息香)ㆍ오미자ㆍ인삼ㆍ흰바곳ㆍ삿갓나물[蚤休]ㆍ버들옷[大戟]ㆍ당귀(當歸)ㆍ방풍(防風)이요,

토산(土産)은 금(金) 【군의 북쪽 1백 리 되는 어파동(於把洞)에서 난다.】 ㆍ석철(石鐵) 【군의 서쪽 60리 되는 용림현(龍林峴)의 서쪽 큰산에서 난다.】 ㆍ족제비털ㆍ송어ㆍ대구ㆍ연어ㆍ방어ㆍ황어ㆍ은어ㆍ전복ㆍ잣ㆍ미역ㆍ다시마이다.

염분(鹽盆)이 17개이요, 도기소(陶器所)가 1이니, 군의 서쪽 마암리(馬巖里)에 있다. 【하품(下品)이다.】


이어 군사 시설을 소개한다.

도덕산 석성(道德山石城)이 군의 북쪽에 있고, 【둘레가 2백 35보(步)이며, 안에 군창(軍倉)이 있고, 샘 3이 있는데, 사철 마르지 아니한다.】

덕응주산 석성(德應州山石城)이 군의 동쪽에 있다. 【둘레가 4백 12보(步)이다. 안에 군창(軍倉)이 있고, 큰 못 1이 있는데, 사철 마르지 아니한다.】

역(驛)이 3이니, 시리(施利) 【예전에는 실실리(失失里)라 하였다.】 ㆍ기원(碁原)ㆍ마곡(磨谷)이요, 【모두 태종 9년 기축에 비로소 설치하였다.】

참(站)이 1이니, 곡구(谷口)이며, 【금상(今上) 3년 신축에 비로소 두었는데, 처음 이름은 심합배역(新合排驛)이다.】

채리(寨里)가 4이니, 아오(阿吾)ㆍ상가사(尙家舍)ㆍ어파홍(於波紅)ㆍ군대(軍代)이다. 【이 4채리는 모두 태조 7년 무인에 비로소 설치하였다.】

목장(牧場)이 1이니, 두을언대(豆乙彦台)이요, 【군의 남쪽 20리에 있는데, 국마(國馬) 1백 38필을 방목(放牧)한다.】

봉화가 4곳이니, 호례(好禮) 【북쪽으로 길주(吉州) 기곡(岐谷)에 응하고, 남쪽으로 오라퇴(吾羅退)에 응한다.】 ㆍ오라퇴(吾羅退) 【남쪽으로 말흘라(末訖羅)에 응한다.】 ㆍ말흘라(末訖羅) 【남쪽으로 마운령(磨雲嶺)에 응한다.】 ㆍ마운령(磨雲嶺) 【남쪽으로 북청(北靑) 다포(多布)에 응한다.】 이다.

【원전】 5 집 698 면


더 유의할 점은 지명이 온통 조선말이 아닌 여진어라는 사실이다.

이는 함경도 일대가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외국임을 말해준다.

이 단천사만 잘 파고들어도 한국문화사 커다란 의문들이 술술 풀린다.

문제는 여러 사정으로 현장을 확인하지 못하니 환장할 노릇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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