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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해동금석원보유海東金石苑補遺 펴낸 유승간劉承幹(1881~1963)은 누구?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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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큰 아이 논술 시험을 들여보내고, 주차할 장소가 없어 한 주상복합 건물 안 작고 친절한 커피숍에서 시간을 보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에 이런 저런 내용을 뒤지다가 바이두 백과에서 해동금석원보유海東金石苑補遺를 펴낸 유승간劉承幹(1881~1963) 항목을 읽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유승한이라고 했는데, 幹을 '한'으로 발음한 근거는 뭔지 모르겠다.

김명호 선생님의 명저 "중국인 이야기"에 나오는 '문화노인'의 선배들, 그들의 이야기도 언젠가 책으로 나옴 좋겠다. (아마 번역서도 나오기 힘들겠지만.)

언젠가 기회가 주어지면 한 석달 정도 강남을 돌며 이들의 자취를 밟아보고 싶다.




제가 오늘 읽은 내용이 궁금하진 분들은 아래로, 사진은 유승간과 그의 서고, 호주 가업장서루(1924년 완공).(불펌)

유승간劉承幹은 자가 정일貞一, 호가 한이翰怡, 구서거사求恕居士, 만년의 자호는 가업노인嘉業老人으로 절강성 오흥현吳興縣(현 호주시湖州市) 남심진南潯鎮 사람이다.

유승간은 평생 서적 수집에 매달렸고 전각에 몰두했으며 책을 보전하는 데 마음을 기울였다. 막대한 자금을 들여 장서藏書, 각서刻書, 취서聚書 등 60만 권 20만 책을 모으고 “가업당장서루嘉業堂藏書樓”를 지어 보관했다.

어려서는 고향의 호주湖州의 심계서원潯溪書院에서 수학하고 청 광서31년(1905) 수재가 되었다. 선통연간 전국적 재해에 은 3만여 량을 기부하고 분부낭중分部郎中 사품경함四品卿銜 사품경당四品京堂을 획득해 벗들로부터 ‘경경京卿’이라 불리곤 했다.

유승간은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져 스스로 “약관에 을부乙部(사부史部)의 도서를 즐겨 다뤘다(弱冠即喜治乙部之書)”고 했다. 고적 판본에 뛰어난 지식을 가져 상당한 수준의 감정 능력을 갖췄다.

1914년 심회식沈曾植이 절강통지총찬浙江通志總纂에 임명되었을 때, 그를 분찬分纂으로 초빙했다. 1920~1921년 사이에는 청사관명예찬수清史館名譽纂修가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수구파에 속해 상해에 거주하는 옛 청의 원로들과 친분을 가졌으며 ‘송사淞社’를 결성해 정기적으로 아회雅會를 가졌다.

1911년 상해에 정착해 1963년 그곳에서 향년 82세로 사망했다.

광서33년(1907) 호주 육심원陸心源의 벽송루장서皕宋樓藏書 전체를 일본 세이카도 분코靜嘉堂文庫가 구입했다. 벽송루장서는 일찌기 장원제張元濟가 구매하고자 했으나 육씨 집안의 요구액과 차이가 커 성사되지 못했다.

세이카도 분코가 벽송루장서를 구입했다는 소식이 퍼진 뒤 일본의 한학자들이 중국에 와서 송원대 판본을 다량 구매하여 상당량의 귀중본이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이는 중국 지식계에도 충격을 주어 중국인들이 고적 구입에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

유승간은 용동甬東 노씨盧氏의 포경루抱經樓, 독산獨山 막씨莫氏의 영산초당影山草堂, 인화仁和 주씨朱氏의 결일려結一廬, 풍순豊順 정씨丁氏의 지정재持靜齋, 태창太倉 무씨繆氏의 동창서고東倉書庫 등 십수 가의 장서를 구매했다.





무전손繆荃孫은 가업당총서서嘉業堂叢書序에서 “이리 저리 흩어져 갈 곳 몰라하던 장서가들의 책을 거두어 모아 풍부하기로 해상의 으뜸이 되었다.”고 했다.

유승간의 장서 가운데 귀중한 것으로는 송판宋版 사사四史(사기, 한서, 후한서, 삼국지)가 있다. 오청석吳昌碩은 장서루에 “송사사재宋四史齋”라는 제액을 썼다.

또한 미산간본眉山刊本 송서宋書, 장원제張元濟가 인쇄한 백납이십사사(百衲二十四史)도 부족한 부분을 이곳에서 보충했다.

송宋 개경開慶 110권 학산선생대전집鶴山先生大全集 송 순희淳熙 무술본戊戌本 두씨연주집竇氏聯珠集도 유일본이다.

호주의 가업장서루嘉業藏書樓는 그가 장서, 판각 등을 보관하기 위해 지은 서고다. 1920년부터 남심진南潯鎮 서남교西南郊의 소련장小蓮莊 자고계鷓鴣溪에 20무의 땅을 구입하고 12만을 투입해 1924년 완공했다.

건물은 'ㅁ'자형의 전형적인 원림건축이다. 그는 청 광서제 사후 숭릉崇陵 식수에 기부하여 선통제로부터 ‘欽若嘉業(흠약가업)’이라고 쓴(육윤상陸潤庠이 대필) 구룡금변九龍金匾을 받았는데, 장서루의 이름 ‘가업장서루嘉業藏書樓’는 여기서 딴 것이다.




유승간은 장서루에 무전손繆荃孫, 왕국유王國維, 동수경董授經 등 저명인사를 초빙해 장서의 고정 교감 작업을 의뢰하고 선본장서지善本藏書志 28책을 냈다.

유승간은 서적을 수집, 소장했을 뿐 아니라 직접 판각, 출판도 했다. 대표적으로 가업당종서嘉業堂從書, 구서재총서求恕齋叢書, 영송사사影宋四史, 구오대사주舊五代史注 등을 들 수 있다.

이밖에도 청 정부에서 금서로 규정했던 안룡일사安龍逸史, 옹산문보翁山文補 등도 출간했다. 노신도 이를 의아하게 여겼다.

유승간은 스스로 청조의 유신으로 자리매김했다. 평소 서신에서 민국기원民國紀元을 사용하지 않았고 부의溥儀가 만주국 황제로 즉위했을 때는 축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청의 문자옥文字獄에 반발해 금서를 출간했다.

유승간은 책의 간행(각서)을 엄격하게 관리했다. 첫판을 찍으면 먼저 저명한 학자들에게 교정을 의뢰한 뒤 재판을 찍었다. 인쇄가 완료된 뒤에도 다시 교정을 보았다.

가업당에서 간행한 서적은 훌륭하고 단아한 품격(精美典雅)을 갖춘 것으로 명성을 날렸다. 완성한 책은 유승간이 모두 제발을 썼다.

그가 이익만 보고 책을 찍지 않았고 여러 학자에게 보내주었다. 그 가운데는 일본학자도 다수 있다. 노신은 병후잡담病後雜談에서 “이런 출판인에 매우 감동했습니다.(對於這種刻書家,我是很感激的)”라고 했다.

1933년 이후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자 조금씩 장서를 매도하기 시작했다.

유승간의 장서가 흩어진 것은 크게 네 시기로 나뉘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중일전쟁 이전으로 송간사사 및 송간학산선생대전집 등은 보례당寶禮堂 반명훈潘明訓에게 팔렸다. 송회요宋會要 수고본은 국립북평도서관國立北平圖書館에 팔린 뒤 영인본이 출간되었다. 명실록明實錄은 중앙연구원中央研究院에 팔렸다. 영락대전永樂大典 잔본은 대련만철도서관大連滿鐵圖書館(현재 북경도서관北京圖書館에 있다.)에 팔렸다.

두 번째는 중일전쟁 발발 이후로 유승간은 대량의 귀중본을 상해로 옮기고 정진탁鄭振鐸, 서옥삼徐玉森의 소개를 받고 비밀리에 중경중앙도서관重慶中央圖書館에 팔았다.(현재 대만에 있다.)

세 번째는 중일전쟁 종전 이후로 절강대학도서관浙江大學圖書館이 가업당장서嘉業堂藏書 2만 3천권을 구매했다.

네 번째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로 복단대학도서관復旦大學圖書館에 절반은 기증, 절반은 매도했다. 그는 “내 스스로 모아 내 스스로 잃었다”며 자조하고 “단지 모을 뿐 아니라 영원히 전할 방도를 찾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생각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전후 내전으로 위기에 처했으나 총리 주은래周恩來의 명령으로 보전될 수 있었다.

1951년 유승간은 절강도서관에 “장서루와 주변 부지, 장서, 서판 및 관련 설비는 모두 귀관에 기증하고자 하니 영구히 보존해 주시길 바랍니다.”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에 따라 현재 장서루는 절강성도서관 부속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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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중국사 전공 이태희 선생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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