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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한국프로야구, 전두환의 야심한 기획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0.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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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포착] 한국프로야구 개막전 시구하는 전두환
2020-03-28 08:00
정권이 우민화 정책으로 시작해 최고 인기 스포츠로 발전

 

 

담을 뛰어넘는 야구팬들..1982년 4월 4일 청주구장 프로야구 한 풍경이 당시의 야구 열기를 웅변한다.

 

 

1982년 9월 14일 잠실경기장에서는 세계야구선수권 대회 한국과 일본의 결승전이 열렸다. 이 경기는 두 장면이 명장면으로 꼽히어니와, 0-2로 끌려가던 8회말 김재박의 그 유명한 개구리 점프 번팅과 한대화의 역전 결승 3점 홈런이 그것이다. 선동열이 완투한 이 경기를 향한 열광은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 그것 못지 아니했다. 내 세대는 저 장면은 누구나 다 기억한다. 그만큼 강렬했다. 

선동열은 당시 고려대 재학 중이 아니었나 하는데, 이를 통해 한국야구에 세대교체가 일어나 그 이전 부동의 에이스 최동원이 선동열한테 자리를 내 주는 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에서 절치부심한 최동원이 호락호락 당하지 않았다. 저 경기를 마지막으로 프로야구에 뛰어들어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기에 이른다. 

MBC청룡과의 역사적 한국프로야구 개막전에서 제1호 홈런을 치고는 좋아 어쩔 줄 모르는 삼성라이온즈 이만수. 포수로서 실력은 형편없었다.



사진으로 보는 한국현대사 명장면을 겨냥한 [순간포착]이 이번 주에는 한국프로야구 출범을 이야기하면서 뜬금없이 저 세계선수권대회를 논하는 까닭은 그와 밀접한 까닭이다.

그 대회가 열린 그해 3월, 한국프로야구는 마침내 출범했다. 첫해만 놓고 보면 박철순의 시대였다. 미국 마이너리그에서 뛰던 그는 프로야구가 출범하자 귀국해 OB베어스에 둥지를 틀고는 위대한 기록을 써내려간다. 그와 더불어 이만수가 국민영웅으로 떠오른 시기이기도 했으니, 홈런을 칠 때마다 폴짝폴짝 뛰면서 홈으로 들어오던 기억 생생하다. 

개막 이틀전 개막식 예행연습. 선수대표 선서를 박철순이 했나 보다.



문제는 세계야구선수권대회가 아마추어들의 향연이라는 점이었다. 지금은 바뀐 것으로 아는데, 직업으로서의 야구를 택한 선수들은 참가자격이 없었다. 프로야구 출범 이전엔 대학을 졸업한 모든 야구선수는 실업팀에서 뛰었다. 글자 그대로 회사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그들에게 프로야구 출범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역사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세계야구선수권 대회에 참가한다는 것은 프로행 유보를 의미했다. 이 문제로 당시 한국야구계는 상당한 내홍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종범에 앞서 도루 야구 시대를 연 김일권만 해도, 저 대표팀에 선발되었지만, 난 돈을 벌어야 한다며 거부하고는 해태 타이거즈로 갔다. 암튼 그리하여 1982년 원년 프로야구는 스타 선수가 대거 대표팀에 남아 프로야구 그 질 자체는 저하한 그런 느낌을 줄 수밖에 없다. 당시 한국대표선수단 구성은 다음과 같다. 

개막식 식전행사


감독 : 어우홍
코칭 : 김충, 배성서
투수 : 김시진, 최동원, 임호균, 선동열, 박노준, 오영일, 박동수
포수 : 심재원, 김진우, 한문연
내야수 : 김상훈, 이석규, 정구선, 한대화, 김재박, 박영태, 이선웅
외야수 : 이해창(주장), 박종훈, 조성옥, 장효조, 유두열, 김정수


이들 중 대학 재학 중인 선동열, 그리고 저 무렵에 대학생이었는지 선린상고 재학생이었는지 자신은 없는 박노준 정도를 제외하고는 1983년 모조리 고교 연고지를 기준으로 하는 각 프랜차이즈 구단으로 일제히 프로야구로 진출하게 된다. 대구 출신 투수 김시진과 타격 제조기 장효조는 삼성으로, 부산 사나이 최동원은 롯데로, 한대화는 해태로, 도루가 주특기인 이해창은 MBC로, 이름 때문에 언제나 말이 많은 유두열, 그리고 타격이 아주 좋은 박종훈은 OB로 갔다. 

선수단 입장



우리 저 기사 부제에도 프로야구 출범이 전두환 군사정권에 의한 우민화 정책으로 시작했다는 언급이 있지만, 내가 저 대목을 고민하다가 그대로 두었으니, 그렇다고 그런 측면이 없는 것도 아닌 까닭이다.

다만, 시대는 이미 변했다. 전두환이 박정희를 잇는 군사정권 연장이기는 했지만, 그 이전 시대와는 또 달라졌으며, 이제 시대는 걷잡을 수 없는 대중문화시대로 치달리기 시작했다. 

덧붙여 전두환 자신이 워낙 스포츠광이었다. 요새도 치매 걸렸다 하면서 걸핏하면 골프장으로 행차하거니와, 역대 대통령 중 그는 김영삼과 다른 차원에서 스포츠광이었다. YS는 조깅광이었지, 그렇다 해서 다른 스포츠에 조예가 있거나 잘 한다고 하기는 힘들었지만, 전두환은 달랐다. 

OB베어스 창단

 

덧붙여 프로야구 출범을 저리 단순화해선 안 된다. 그것은 누구보다 야구인들 열망이었고 국민 여망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된다. 국민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기도 했다.

암튼 한국프로야구는 1982년 3월 27일 마침내 팡파를 울렸으니 이리 해서 한국 역시 스포츠스타가 돈과 명예를 동시에 거머쥐는 시대로 진입했다.

그가 준비한 선물이기에 서울운동장(동대문구장)에서 열린 개막식 시구는 당연히 당시 최고권력자 전두환 몫이었다. 양복 정장에 넥타이를 매고 시구에 나선 그의 투구폼이 어땠는지는 내가 기억에 없다.

6개구단 심벌



이로써 고교야구시대는 끝났다. 봉황대기며 하는 그런 시대가 가고 프로시대가 왔다. MBC 청룡(서울), 삼미 슈퍼스타즈(경기·강원), OB 베어스(충청), 해태 타이거즈(전라), 삼성 라이온즈(경북), 롯데 자이언츠(경남) 6개 창립 구단 중 절반이 주인이 바뀌고 팀 또한 배로 늘어났다. 연봉도 졸라 올랐다.

프로야구 개막은 단군조선 개국 이래 한반도 역사가 또 바뀌었음을 웅변하는 사건이었다.

개막공연 풍물놀이. 당시가 이른바 국풍國風의 시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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