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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할머니 죽음을 절규하는 성종 왕치王治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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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제6대 국왕 성종 왕치王治는 아버지가 왕건의 아들 대종戴宗 왕욱王旭이요, 어머니는 선의태후宣義王后 유씨柳氏라,

이 선의태후는 다시 아버지가 왕건, 엄마가 정덕왕후貞德王后 유씨柳氏라, 복잡한 콩가루 집안 사정을 다시금 확인한다. 

뭐 복잡하니 아래 계보도를 참고해 주셨으면 한다. 
 
 

 
보다시피 그 부모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버지는 왕건으로 같지만, 어머니가 다른 이른바 동부이모同父異母간 결혼이다. 

앞서 말했듯이 고려 왕조는 이럴 때 여자는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 성을 따른다. 왜? 그래야만 대외로 우리는 족내혼이 아니라 족외혼이다 라는 사기를 칠 수 있는 까닭이다.

성이 다른 사람들이 결혼했으니, 우린 남남과의 만남이다 이런 식의 사기를 쳤다는 뜻이다.

따라서 성종한테 신정왕후神靜王后 황보씨皇甫氏는 친할머니다. 

성종은 어려서 친엄마 선희태후 유씨를 잃고 얼마 안 있어 아버지 대종 왕욱까지 잃었다. 고아가 된 그를 거두어 길러준 이가 친할머니 신정왕후였다.

그러니 할머니에 대한 정이 얼마나 더 각별하겠는가? 

다행히 이 친할머니는 아주 오래 살아서 손자 왕치(성종)가 왕이 되고서 그 이듬해까지 살다가 983년 7월 9일에 갔다.

성종이 이 할머니를 어찌 생각했는지는 고려사 후비 열전에 절절하게 남았으니 길지만, 부모를 잃고 할머니 손에 자란 손자의 애틋한 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전문을 인용한다. 

하도 고사가 많아 하나하나 해설해야겠지만 뭐 이렇다는 정도로 읽어주셨으면 한다. 성종은 효심이 극심했다.


성종은 일찍이 〈친모인〉 선의태후宣義太后를 여의고 (할머니인 신정) 왕후가 길러주었으므로 (신정왕후가 죽자) 애통해 하고 그리워하며 예를 다하여 백관을 거느리고 빈전嬪殿에 나아가 시호諡號를 올려 신정대왕태후神靜大王太后라 했으니 그 책문冊文은 다음과 같다. 

“덕德은 〈황제黃帝의 어머니인〉 부보附寶와 같고, 공功은 〈후직后稷의 어머니인〉 강원姜嫄과 견줄 만하니, 일찍부터 손금에 기이함이 나타났고 또한 태교胎敎도 밝고 신령스러웠습니다.

때마침 태조[聖祖]께서 처음 점을 쳐 좋은 짝을 얻으려 할 때 왕후[六宮]로 뽑히셔서 〈훗날〉 모든 정사에서 〈나라가〉 번창할 토대[昌基]를 도우셨습니다.

부인의 도리를 잘 닦아 이에 왕후로서의 의절[坤儀]을 갖추셨고 절검節儉의 기풍을 내전[閨閫]에서 행하시어 올바른 규범[箴規]의 뜻을 조정에 널리 퍼트리셨습니다.

번희樊姬는 갓 죽인 짐승의 고기를 먹지 않아 초왕楚王이 〈자신의〉 잘못을 고쳤고, 위녀衛女는 음탕한 음악을 듣지 않아 제齊 환공桓公이 〈자신의〉 잘못을 알게 되었으니, 〈태후께서도 두 사람과 같았습니다.〉 하물며 황제와 같이 연輦에 오르기를 사양한 〈반첩여班倢伃 같이〉 겸손하였고 여럿이 모인 곳에서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또한 〈제의 왕후가〉 반지를 깨뜨린 것 같은 지혜는 여러 임금한테서 존경을 받았습니다.

패업霸業이 일어남은 그 경계하는 〈마음〉으로 인한 것이며, 큰 계획[洪啚]이 융성함은 그 현명한 계책에 인한 것입니다.

오래지 않아 어가御駕가 상산商山으로 들어가 하늘이 기杞나라를 무너뜨리자 40여 년[四紀]을 홀로 사시면서 여러 손자를 돌보아 기르셨으니, 〈그〉 이름은 경종景鐘에 새겨지고, 〈그〉 일은 여사女史의 기록[彤管]에 빛납니다.

돌아보건대 〈저는〉 보잘 것 없는 몸으로 일찍이 큰 불행[閔凶]을 만났으니 겨우 젖니를 갈 나이가 되어 이미 어머니를 여의었고, 어린 나이에 이르러서는 아버지마저 잃어 문득 할머님 품안에 돌아갔지만 마치 부모님의 슬하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맛난 음식은 입에서 떼어 매번 〈저를〉 먹여 주시는[吐哺] 은혜를 더하시었으며, 부드럽고 따뜻한 옷은 몸에 붙였다가 몇 번이고 이 외로운 몸에게 입히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대개 어루만지고 길러주심으로 인하여 장성함에 이르러 다행히 문음門蔭의 공을 이어받고 외람되게도 선전禪傅의 자리를 얻었습니다.

이제 조선祖先의 덕에 보답하려 하고, 손자의 정성을 바치려 맹서[誓]하던 차에, 어찌 태사太史가 재앙을 적고 영대靈臺에 요망한 기운을 고하는 줄 꾀하였겠습니까?

소나무처럼 〈장수를〉 누리지 못하시고, 난蘭 같았던 분이 갑자기 〈세상을〉 버리시니 〈타시던〉 수레[魚軒]는 고요하고 〈머무시던〉 전[鑑殿]은 아울러 텅 비었습니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을 도운 열 신하[十亂]가 빠지니 백 명으로도 대신하기 어려우며, 모든 왕족[九族]은 기댈 데가 없는 탄식을 뱉고 온 백성들은 망극罔極한 슬픔을 머금었습니다.

이제 장례를 치를 날[遠日]이 이르렀으니 현궁玄宮도 다 지어지고자 하나이다. 빈당殯堂를 열어 염하는 의례[殮儀]가 반드시 갖추어졌으며 능[泉隧]에서 행할 하관下棺 절차도 장차 더할 것입니다.

예관禮官에게 특별히 명하여 그들로 하여금 성대하고 아름다운 〈덕〉을 나타내게 하면서, 과거의 향기로운 여러 행적을 상고하여 휘호徽號로 나타내어 이름을 바꿉니다. 이제 아무 관직에 있는 아무개를 보내 삼가 시호를 올려 이르기를 신정대왕태후神靜大王太后라 하나이다.”

라고 하고는 수릉壽陵에 장사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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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의 소폰서 황보씨皇甫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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