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조의 쿠데타를 부르는 빌미가 된 김치양金致陽은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을 통해 우복야右僕射라는 고위직 타이틀을 뒤집어 쓴 것으로 나오는 인물로, 그 행적이 좋지는 아니해서 고려사에서는 반역叛逆으로 분류해 열전을 배치했다.(권 제127 열전 제40)
이를 보면 그는 동주洞州 사람으로 천추태후千秋太后 황보씨皇甫氏 외족外族이다. 고려시대 동주가 어딘지 정확히 나는 모르겠다만, 변방 아닌가 싶은데, 아무튼 이런 촌놈이 어떻게 해서 출세하게 되었는지는 묘한 측면이 있다.
이에 대해 그의 열전에서는 성격이 간교하고, 일찍이 거짓으로 중 노릇을 하면서 천추궁千秋宮을 출입하며 자못 추한 소문을 일으키니, 성종成宗이 이를 알고 곤장으로 다스려 먼 곳으로 유배 보내었다고 했으니, 이를 김치양 주체로 이해하면 출세하고자 중의 길을 선택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별 볼 일 없는 그를 발탁한 것은 아무래도 인척 관계도 있는 천추태후였던가 싶은데, 중으로 천추태후 궁을 드나들면서 세 치 혀로 태후를 농락하고서 마침내 그 몸까지 안고서는 출세 가도를 달린 게 아닌가 한다.
그가 드나든 시절을 성종 시대라 하거니와, 그렇다면 천추태후는 누구인가? 이 문제는 나중에 다시 돌아보기로 하고, 이 자리에서는 그는 헌애왕후獻哀王后 황보씨皇甫氏라 왕건의 아들인 대종 왕욱王旭과 선의왕후 사이에서 났으니 바로 앞선 글에서 봤듯이 두 사람 사이에 난 다른 걸물이 있으니 그가 바로 성종이다.
훗날 천추태후라 일컫는 헌애왕후는 성종이 바로 오빠다.
그런 그가 성종 바로 앞에 왕이 된 경종의 왕비가 되었으니, 그런 경종이 27살에 요절하고는 청상과부가 되어 왕태후가 되어 궁에 계속 머무른 것이다.
경종은 성종한테는 사촌형님. 자기 여동생이 형수님이었다. 그런 여동생 형수님을 자기가 왕이 되자 성종은 어찌 대접했을지 참 궁금한 대목이지만, 왕실에는 왕실 법도가 있으니, 어쩌겠는가? 왕궁에 그대로 머물면서 태후 노릇을 했으니 말이다.
이 천추태추로서도 불쌍한 게 청상과부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생몰연대가 남았으니 964년, 광종 15년에 태어났다 했으니, 960년 생인 성종한테는 네 살 터울 나는 누이였다. 남편 경종이 981년에 사망했으므로, 불과 18살에 청상과부가 된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외로웠겠는가? 그 외로운 틈을 김치양이 비집고 들어간 것이다.
그런 김치양이 자기 동생이자 왕태후이며 형수인 천추태후와 추문을 일으키니 이를 보다 못한 성종이 곤장을 때리쳐서 변방으로 쫓아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목종穆宗이 즉위하면서 시대가 바뀐다. 목종은 바로 천추태후 아들이다. 고려사 열전에서는 변방으로 나간 김치양을 다시 궁중으로 불러들인 것이 목종이라 했지만, 아무래도 그 배경에는 엄마 천추태후가 있다고 봐야 한다.
이를 보면 천추태후는 자기 오빠 성종이 죽기만을 기다린 셈이다. 목종이 즉위한 시점이 997년이니 그래봐야 이때 천추태후는 서른네살에 지나지 않았다. 불타는 밤이 필요한 중년이었다. 서른네살 엄마에 열여덟살 젊은왕.
냅다 오빠 성종이 죽기만 기다렸다가 그런 꿈 같은 시절이 오자마자 천추태후는 디립다 애인 김치양을 불러들이고는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을 삼았다는데, 그 주체를 목종이라 했지만, 이 역시 주체는 천추태후로 봐야 한다.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 명칭으로 보아 궁궐 문지기 대장이다. 경복궁 수문장이다.
한데 엄마 사람이지만 김치양은 이내 목종조차 이내 자기 사람으로 사로잡은 것으로 보인다. 세 치 혀가 보통은 아니었음에 분명하다.
열전에는 이로부터 몇 년이 되지 않아 총애하는 것이 비교할 데 없게 되고 느닷없이 우복야 겸 삼사사右僕射兼三司使로 승진했다 하는데, 정승 반열이다.
한데 김치양이 출세한 비밀은 딴 데 있었다. 열전에 이르기를 그의 음경이 능히 수레바퀴를 걸 수 있었다[陰能關輪]고 한다.
도대체 물건이 얼마나 컸으면 거기다가 수레바퀴를 매단 단 말인가? 변강쇠보다 더 힘이 셌다.
뭐 말로야 한국 여성들이 작은 한국 남자들을 위로하며 하는 말이 "물건은 크기가 중요한 게 아니고 테크닉이다. 작다고 주눅들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하곤 하는데, 새빨간 거짓말이다.
일단 크고 봐야 한다. 김치양은 수레바퀴를 매달아도 끄떡없는 거대한 물건으로 세상을 농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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