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 탄생 이후 인류사는 부계 중심으로 일방적 흐름을 보였으니 그에 대한 근자의 움직임은 여기선 일단 논외로 치고
그 대표 증좌가 아들딸 구별없이 그 자식은 남자 성씨를 따르는 시스템이다.
하지만 예외없는 법칙은 없어 간혹 어머니쪽 성씨를 따르기도 하는데 이를 종모성從母姓이라 한다.
종모성이 탄생하는 조건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크게 두 가지 경로로 좁힐 수 있으니 첫째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고 엄마만 알 때는 엄마성을 따른다.
두번째는 아버지를 알고도 일부러 아버지를 피하고 엄마성을 따르는 경우가 있으니 오늘 이야기하고 하는 것은 바로 이 경우다.
이 두 번째는 극심한 근친혼 사회에 주로 나타나는 특징이 있으니 이 근친혼 사회라 해도 마누라는 반드시 그 씨족 바깥에서 데리고 와야 하는 족외혼이 작동하는 사회가 그렇다.
신라 고구려 백제는 물론이고 고려 조선왕조는 철저한 족외혼 규율 사회였다.
그렇다면 무엇으로써 씨족 바깥임을 보증하는가?
그것이 바로 성씨다. 종자가 무엇이건 성씨만 다르면 족외혼으로 분류됐다.
이는 의외로 중국에서 두드러진데 물론 왕조별 차이는 있지마는 중국 황실 혼인을 보면 황제의 고모 딸이 황후로 책봉되는 사례가 많음이 그 증거다.
고려 왕실은 그 개창주 왕건의 경우는 이딴 거 따질 여유가 없었고 무엇보다 삼한 일통 과정에서 여러 세력을 규합해야 했으니 이 과정에서 29명이나 되는 여인을 정식부인과 첩실로 받아들였다.
물론 다 족외혼이었다.
문제는 저기서 까댄 엄청난 아들딸이 문제였다.
이제 기반은 잡혔으니 족외혼과 근친혼을 결합해야 했다.
이것이 기록 망실로 남지는 않았으나 왕건시대에 율령이 있었다.
첫째 왕비족도 왕건의 자손으로 삼는다.
둘째 동부동모는 혼인할 수 없다.
셋째 공주는 전부 외가 성을 따른다.
이것이 골자였다.
이 중에서 셋째가 특히 관건인데 종모성을 함으로써 족내혼이라는 혐의를 벗어제낀 것이다.
이른바 인통姻統은 이렇게 해서 확립되었다.
이 원칙에 따라 같은 엄마에서 났는데도 아들은 아버지를 따라 왕씨요 딸은 엄마성을 따랐다.
이 시스템이야말로 극심한 근친혼 사회가 족내혼이라는 혐의를 피한 장치였다.
이 원리가 놀랍게도 화랑세기에 나오는 그 원리랑 똑같다.
왕비를 배출하는 인통은 철저히 모계로만 이어졌다.
나아가 이 원리가 황족은 야율씨 황후는 소씨로 분기한 거란의 그것과도 똑같다.
진골정통과 대원신통, 근친혼사회가 족외혼을 유지하는 장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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