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김씨라고 하면 신라왕실의 후예로 여러 왕의 후손을 자처하는 모든 성의 집합체다.
경주김씨가 가장 대표적이겠지만, 광산김씨, 전주김씨, 강릉김씨 등 다른 본관의 성들도 포함하며 심지어는 다른 성인 안동권씨 등도 조금 무리하여 본다면 포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 혈족들의 주장대로 이들이 정말로 신라김씨의 후예냐 아니냐 하는 것은 별로 의미 없는 이야기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이와 겐지의 후예냐 아니냐가 뭐가 중요하겠는가? 그들이 그렇게 프로파겐다하고 그렇게 행동하고, 또 남들이 사실이야 어쨌건 그렇게 믿는 척이라도 해주었다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일반적으로 후삼국시대, 신라김씨의 동향을 생각해 보면 이들의 본향이라 할 신라왕실의 움직임에 절대적으로 동조하고 있었을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일본의 경우 비슷한 시기에 천황가에서 분적한 세이와 겐지나 간무 헤이시 같은 경우 명백히 황손이었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뿌리가 되는 공경귀족들과 명백히 대립하는 입장이었다.
공경귀족들도 이들이 자신들과 조상을 같이 하고 있음을 알았지만 자신들이 부릴 수 있는 무부武夫 이상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헤이시와 겐지도 이미 무가가 된 이상 공경 귀족을 타도하지 않고는 자신들의 야망과 생존을 담보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역시 경제적 기반이 그 혈족의 포지션을 결정하는 것으로 어느 천황의 후예 이런 것은 더이상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된다는 말이다.
후삼국시대, 신라김씨의 후예들은 아마도 당시 다양한 선택을 해야 했을 것이다.
그 중에는 헤이케나 겐지처럼 자신들은 신라왕실에서 갈려 나왔다는 의식이야 있었겠지만, 이미 후삼국시대에 준동하던 많은 호족과 동일한 입장에서 사고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일본사에서 헤이케와 겐지가 무가정권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신라김씨의 후손 역시 왕실에서 분가하여 이미 지손으로 멀리 갈려버린 이들이 후삼국 이후에는 왕실을 대신하여 주인공으로 떠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통일신라시대 신라김씨 후예는 소백산맥 넘어서 구 백제와 신라 땅까지 많이 퍼져 나갔을 것이라 보는데, 이들이 후삼국시대가 되면 이미 더이상은 신라왕실과 동기화하지 않고 현지의 대호족, 혹은 궁예, 견훤 등과 연합하여 당시 이미 앙샹레짐의 상징이 되어버린 신라를 공격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점쳐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궁예가 신라왕의 버린 자식이라는 믿지 못할 주장도 그 함축하는 의미를 상당히 곰씹어 볼 만한 부분이 있다 할 것이며 후백제에 신라계로 보이는 박씨, 김씨, 최씨가 있는 것도 이해가 가는 일이다.
이렇게 본다면 후삼국 당시 경순왕의 선택이 얼마나 탁월한지 알 수 있다.
기왕 망할 것, 고려 쪽으로 자빠지자는 경순왕의 탁월한 선택에 신라김씨 본가는 마지막 순간에 구원을 얻었다.
아마 경순왕의 선택이 아니었다면, 신라김씨 본가는 공중분해되어 사라지고 이로부터 갈려나간 지류들이 호족의 간판을 걸고 새 시대의 주인이 되어 신라김씨 혈족의 줄기를 이어갔을 것이다.
경순왕이 망하는 장면을 폼나게 잘 선택한 덕에 한국사에서는 드물게도 왕실 본가가 망하지 않고 후세에도 계속 번성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신라 김씨 후손 중 경순왕의 후손들은 경순왕에게 백만배를 하더라도 부족함이 없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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