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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허정 회고록과 파리에서 찾은 독립운동 흔적

by taeshik.kim 2018.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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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보니 올해 초다. 2월 11일, 내 페이스북에다 나는 아래와 같이 썼다. 


헌책방에 들렀다가 슬쩍 쌔비왔다.

백두진 회고록이랑 같은 칸을 차지해 고민하다 우선 허정부터 자빠뜨리기로 했다.

난 회고록 아카이브 구축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지금 여기 우리는 어떻게 와 있는가? 

그 편린의 하나가 잡힐 줄 혹 알겠는가?


그러면서 나는 아래를 포함해 이 허정(許政) 회고록 《내일을 위한 증언》 관련 사진 석장을 첨부했다. 





내가 구득한 것은 1979년 샘터사에서 나온 초판이다. 이 허정이라는 사람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대단한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이라, 1896년 부산 태생으로 정계에 입문해 각종 요직을 두루 거쳤고, 4.19 직후에는 정부수반까지 지냈으니 그것이 자리합리화로 점철했건 아니했건, 그의 증언은 한국근현대사 중대한 국면들과 연동한다는 점에서 묵직한 의의를 지닌다. 


이를 보면 허정은 24살 때인 1919년 부산에서 3.1운동을 경험하고, 그해 7월 부산을 출발해 육로 기차편으로 상해로 가는데, 이것이 유프랑스를 거쳐 미국을 거점으로 삼는 13년에 걸친 기나긴 해외생활 시작이었다. 


이 회고록은 내가 구득한 즉시로 대략 사나흘만에 독파했거니와, 나에겐 그의 프랑스 행이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그에 의하면 상해로 가서 임정에 가담하려 했지만, 그 지리멸렬한 분열에 극한 회의를 느끼고 "유럽이나 미국으로 가서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다"(41쪽)고 하거니와, 그리하여 그해 11월 마침내 프랑스로 출발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떤 고리로 허정은 프랑스로 갔을까? 


"나는 구미로 나갈 길을 찾기 시작했으나 망국의 멍에를 쓴 가련한 청년에게 원조의 손길을 뻗쳐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백방으로 노력한 결과, 신규식 선생의 알선으로 프랑스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42쪽)



독립운동가 김규식




중국 국민당과 관계가 밀접했고, 프랑스에도 기반히 상당했던 신규식이 당시 중국 국민당 지도자 왕조명(王兆銘)이 중심이 된 유법검학회(留法儉學會)라는 장착단체를 이용해 허정을 프랑스로 보내주었다는 것이다. 


"이 학회(유법검학회)에서 유능한 중국 청년을 프랑스로 유학 보내려 하고 있었다. 때마침 왕조명 씨는 프랑스에 가고 없어서 신규식 선생은 국민당 요인 장계(張繼) 씨와 협의하여 제1차 중국 유학생에 한국 청년 6명을 포함시키기로 합의를 보았다. 중공의 주은래(周恩來)도 이 유학회 2차나 3차쯤 유학생이다. 


1919년 11월, 나를 비롯하여 신동식(申東植), 안승한(安承漢), 백남규(白南圭), 백남칠(白南七), 최정집(崔廷偮) 등 6명의 청년은 40여 명의 중국인 유학생 틈에 끼어 상해를 떠나 마르세이유로 가는 영국 화물선에 승선했다."(42~43쪽)


이리 해서 40여 일만에 도착한 마르세이유를 거쳐 파리에 허정이 도착한 시점은 1919년 12월 크리스마스가 가까운 어느날이었다. 파리에서 김규식이 그곳에 설치한 주불대표부를 찾아가니 당시 이곳에는 황기환(黃玘煥)이 대표부 일을 맡은 가운데 조소앙, 윤해(尹海), 고창일(高昌一) 등과 함께 지내고 있었단다. 


일자리를 구해야 한 허정은 마침 "베르당 요새 근처 슈프랑"이라는 곳에서 노동자를 대량으로 모집하므로 거기서 일했다고 한다. 슈프랑은 허정에 의하면 "1차 세계대전 당시의 격전지로서 대전 당시 미국이 보내준 군수물자가 야적되어 있어서 이를 정리하기 위해 많은 노동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미 그곳에는 한국노동자 30여 명이 일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베르당이라는 곳이 찾아보니 지금은 '베르됭' 혹은 '베흐덩'이라  표기하는 유명한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와 독일군 전투 현장이다. (이곳 위치는 '베흐덩' 클릭) 


이 슈프랑에서 허정은 반년을 일했다. 


내가 회고록에서 이런 대목들을 접하면서, 허정이 말한 저 사건 혹은 현장 연구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는지를 채 파악하지 못한 채, 막연히 기회가 닿으면 저걸 한 번 파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더랬다. 



우리 공장 파리특파원 김용래. 하라는 취재는 안 하고 냉면만 먹는다. 제 페북에서 무단 전재한다. 뭐 어쩔겨? 초상권, 저작권 고발할겨?



나아가 그땐 이런 생각도 했더랬다. 혹 저 부분이 연구되어 있지 않다면, 마침 우리 공장 파리특파원으로 문화부에서 나랑 같이 학술 문화재를 취재한 경험이 있는 김용래 기자가 나가 있으니, 그쪽에다가 이거 관심있게 파보라 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만 하고는 까마득히 잊고 지냈다. 그러다가 올해 중반기부터인가 느닷없이 김용래 기자가 파리발로 저와 무관하다 할 수 없는 연작 시리즈 취재물을 쏟아내는 것이 아닌가? 그런 시리즈를 보면서 나는 이 무슨 조화옹인가 하고는 빙그레 웃고 말았다. 나아가 그런 일을 해내는 김용래가 대견하기만 하더라. 


김용래 기자의 이 시리즈는 톡톡한 보상을 받아, 오늘 현재까지 3관왕이다. 관훈상 수상자로 결정됐는가 하면, 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으로 선정되고, 더불어 올 한해 연합뉴스 기사를 총결산하는 데서 최고상인 대상을 먹었다. 뭐 이들 상에는 짭짤한 상금이 따르는 모양인데, 이 매정한 친구가 그 흔한 입발린 소리 한 번...선배, 밥 한 번 사께요라는 그 입발린 소리 한 번 없다. 


그래, 난 큰 거 안 바란다. 밥이 안 되거덜랑, 파리행 왕복 비행기, 것도 비즈니스로 함 끊어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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