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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철의 잡동산이雜同散異

차천로는 왜 과거시험을 대리했을까

by 한량 taeshik.kim 2020. 10. 29.
차천로의 글씨


조선 선조 때 문장가로 이름을 떨친 차천로(車天輅, 1556~1615)는 1577년(선조 10)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개성 교수(開城敎授)를 지냈고, 1583년 중시에도 입격하였습니다.

1586년 정자(正字)로 있던 그는 여계선(呂繼先)이 과거를 볼 때 표문(表文)을 대신 지어주는 불법행위를 저질렀습니다.

문제는 대충 쓰면 될 일이었지만 그 문장력 때문에 여계선이 장원 급제하여 일이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차천로는 이 일로 명천(明川)에 유배되었다가 글재주가 있다는 이유로 1588년 용서받았습니다.

그러나 속사정을 음미하면 당시의 부조리가 모조리 담긴 사건이었습다.

첫째, 그는 비교적 한미한 가문 출신이었던 까닭에 문과에 중시까지 거쳤어도 승진이 되지 않았습니다. 글 솜씨 좋다는 평가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택할 길은 권력자에게 아부하는 것이었습니다. 시키면 시킨 대로 하는 것이지요.

둘째, 실록을 보면 과거 비리로 함께 처벌 받은 사람이 셋인데, 핵심 권력자에 관한 내용은 《선조실록》에서 쏙 빠졌습니다. 그는 다름이 아니라 허균(許筠, 1569~1618)의 조카 허징(許㠞, 1614~?)입니다. 《선조수정실록》에는 그 사실을 밝혀 놓았습니다.

사물을 담을 때에는 맞는 그릇이어야 하듯 인재도 걸맞는 쓰임이 있게 마련입니다. 신분이니 스펙-전혀 쓸모없지는 않지만-이니 하는 것보다 능력에 따라 대우받는 세상은 언제나 힘든 모양입니다. 이 과거 비리에 관한 선조의 전교가 음미할 글이므로 조금 길지만 그대로 올립니다.

의금부(義禁府)가, 차천로의 여계선(呂繼先)의 시권(試券)을 대신 지어준 일에 대한 원정(元情)을 입계(入啓)하니, 전교하기를,

“임금이 공경한 마음으로 선성(先聖)을 배알하면 사방의 선비들이 바람같이 달려오고 구름처럼 모여든다. 이때 친시(親試)를 보여 등용하는 것은 바로 훌륭한 인물을 얻어 치도(治道)를 보좌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구제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대정(大庭)에서 창방(唱榜)하고 뭇 관료가 다 하례하는데 미쳐서 장원(壯元)이 된 자가 바로 남곽 처사(南郭處士)나 도척(盜蹠)같은 형편없는 사람이었다. 말하자니 말이 욕되다. 인주의 부끄러움이야 애석할 것이 없고 진신(搢紳)들의 부끄러움도 애석할 것이 없지마는 이는 바로 유림들이 천만 년 동안 씻을 수 없는 수치이다.

보잘것없는 저 여우나 쥐같은 것을 필히 용서치 말고 많은 선비들에게 널리 알려 만세의 경계로 삼아야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무릇 문사(文詞)는 뜻을 엮는 말기(末技)인지라, 미사 여구로 글을 다듬는 일은 장부(壯夫)가 부끄럽게 여긴다.

그런데 감히 쇠똥구리의 흙덩이를 가지고 수후(隋侯)의 구슬이라 생각하여 다른 사람을 위해 대신 글을 지어주고 그릇되이 상종을 하였으니, 이는 아마 평소 전부터 대신 글을 지어주던 솜씨일 것이다. 그 정상이 이미 노출되어 다시 감출 수 없는데도 거짓말을 교묘하게 꾸며 기만하여 상소하였으니, 임금을 안중에 두지 않은 마음이 현저하다.

정유(情由)와 공초(供招)에 의해 자리에 동석했던 유생(儒生)의 이름과 은밀히 출입한 사람이 주고 받으며 서로 응한 절차 및 전후에 걸쳐 범한 죄상을 형추(刑推)하여 낱낱이 궁문(窮問)하라.

또 그의 상소에 ‘세상 사람들은 다른 이가 과거에 오르는 것을 시기하는 일이 자주 있고 누구누구는 전후로 상종하고 있다.’고 하였으니, 사실대로 바르게 아뢸 것도 아울러 궁문하라.

광흥 봉사(廣興奉事) 한회(韓懷)도 천로와 같이 이를 모의했으니, 형신(刑訊)하여 밝히고, 모두 도 삼년(徒三年)에 정배(定配)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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