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 송시열을 배향한 괴산 속리산 기슭 화양서원 주요 건축물 배치양상이다. 주의할 점은 현재 들어선 주요 전각은 2006년 발굴조사 결과와 각종 조선시대 문헌 기록을 대비해서 이후 완조니 새로 지었다는 사실이다. 화양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을 피하지 못했으니 그때 만신창이 되어 사라졌다.
이 화양서원 전각배치와 관련해 너도나도 이구동성으로 지적하는 말이 조선시대 여타 서원 건축배치와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하거니와 치밀한 사전설계에 따른 건축이 아니기 때문이라 말한다. 그런가?
그 입론 근거가 바로 이거다. 송시열 신주에 해당하는 영당, 곧 사당이 저리 위치한다는 그거다. 여타 서원 같으면 저 사당이 북쪽 중앙으로 가야 한다. 이것이 이례異例라 한다.
송자사는 건물 전면에서 바라보는 사람 기준으로는 서원 왼편이나 이는 조선시대 관념으로는 우측이다. 어디 시건방 지게 쳐다보는 사람 기준으로 따진단 말인가? 이 서원은 송시열을 추숭하는 신성공간이다.
동아시아 건축의 그랜드디자인은 남향南向과 조알朝謁 이 두 가지만 있을 뿐이다.
그 주인 오야붕은 항상 북쪽 정중앙에 위치한다. 그 맞은 편 남쪽 하늘엔 태양이 있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북쪽 중앙을 차지하는 이유는 그가 북극성이기 때문이다. 뭇별은 북극성을 중심으로 포진한다. 그래서 오야붕은 언제나 남쪽 태양을 바라보므로 그는 언제나 남향이다.
반면 그를 따르는 시다들은 그 북쪽 오야붕을 향해 양쪽에 도열해 허리를 굽히니 이를 방향으로는 북향이라 하고 그런 행위를 조알이라 한다.
이는 조선시대 궁궐 배치를 보면 명약관화하다. 사람들이 헷갈리는 게 경복궁 근정전이나, 창덕궁 인정전을 그 궁궐 중앙에 위치한다 여기지만, 어불성설, 북쪽 중앙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경복궁 창덕궁이라는 궁궐은 근정전 인정전 권역이 국가의 모든 공식 의례가 치러지는 공적 구역의 전부다. 그 뒤쪽은 왕의 사적인 생활생간일 뿐이다.
그 공적 영역을 보면 근정전이건 인정전은 북쪽 정중앙에 위치하며, 그 마당에 종9품 이상 정1품까지 신하들이 도열한다. 이들의 도열을 바로 조알이라 하며, 이들의 조알을 받는 임금은 언제나 남향하고는 정면 남쪽을 향하게 되는데 그 자리에 바로 광화문이 있으니, 이 광화문이 바로 자오선 자리다.
이처럼 동아시아 모든 건축을 관통하는 그랜드디자인은 오직 이 두 가지 남향과 조알이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송시열을 배향하는 화양서원에서 그 주인공 송시열을 배향하는 송자사는 북쪽 중앙을 갔어야 한다.
그럼에도 왜 화양서원은 송자, 곧 송시열을 북쪽을 두고 우측으로 가고 말았는가?
별거 없다. 이 때문이다. 그 북쪽에 바로 또 다른 사당, 곧 만동묘가 있기 때문이었다.
만동묘란 무엇인가? 존왕양이를 기치에 든 우암은 북쪽 오랑캐 만주 여진에는 굽힐 수 없다 해서 북벌을 주장하고, 그것을 체화할 상징공간으로써 그들에게 망한 중화 왕조 명나라 마지막 황제들인 신종과 의종을 신주로 떠받들어 모시게 되고 그러한 공간으로 만동묘를 구상하게 되는데, 그 뜻을 이어 제자들이 그 자리에다가 화양서원을 세우면서 그 주존 자리에 이미 만동묘가 있으니, 스승이 갈 자리를 우측으로 돌렸을 뿐이다.
다시 말해 저 화양서원 배치양상은 하등 이례가 아닐뿐더러, 동아시아 건축의 그랜드디자인인 남향과 조알을 고스란히 구현하고 있을 뿐이다.
지들이 모르면 덮어놓고 이례란다.
예서 우리가 고려할 또 한 가지 그랜드디자인이 있다. 그건 바로 불교건축이다. 선종이라는 새로운 흐름이 대두하고 그것이 신라말에 물밀듯이 밀려들면서, 마치 조선시대 내로라 하는 사족들이 각 골짜기마다 여긴 내 땅이라 해서 나와바리 점찍기 경쟁이 벌어지거니와, 이를 바탕으로 집성촌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잘 알려져 있다. 이 집성촌을 뒷받침하는 정신적 공간이 서원이다.
이와 똑같은 현상이 불교계에서는 그 훨씬 전에 일어났는데, 주로 신라말-고려초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목이 좋은 사찰마다 한 곳씩 차지하고는 대장 노릇을 하게 되는데, 주로 왕사 혹은 국사를 지낸 권력승들이 그랬다. 이들은 살아서는 물론이요, 죽어서도 산문 하나씩을 개척하게 되는데, 가문으로 치면 시조 혹은 불천위 중시조다.
이들은 살아 생전에는 사찰 경영은 시다 중 모금 성적이 좋은 젊은친구를 주지로 앉혀 맡기고 그 자신은 그 뒤쪽 높은 데다가 암자를 마련해 들어가게 되는데, 이 암자가 후대에는 조사당이 된다. 이 오야붕 권력승이 죽으면 그 자리에 조사당을 짓고, 그를 부처에 버금하는 또 다른 부처로 신봉하게 된다. 이를 위해 탑비를 세우고, 부도를 건립했다.
이 조사당은 언제나 해당 사찰 북쪽 후미진 곳, 높으면서도 그 아래 사찰 전모가 보일랑말랑하는 목 좋은 곳에 세웠으니, 이것이 바로 남향이요, 그곳이 바로 북극성 자리인 까닭이다.
이런 조사가 사찰 중심 권역 안으로 치고들어가면 더 없이 좋겠지만, 문제가 있었다. 그 불국토는 진짜 부처님 자리라, 그 자리는 신성불가침이라, 바로 대웅전이 그곳이다. 대웅전 역시 부처님을 모신 전당인 까닭에 언제나 북쪽 정중앙에 위치한다. 아무리 조사가 훌륭한 학덕 인덕을 지녔다 해도 어찌 부처님 자리를 넘보겠는가?
그 자리는 부처님께서 계시니 저 자신은 그 자리를 슬쩍 피해, 그러면서도 그 뒤쪽 높은 데서 자기 나와바리요 왕국인 사찰을 한눈에 내려다 보는 그런 목 좋은 데 정좌하게 되는 것이다.
이걸 그대로 흉내낸 것이 바로 성균관 향교 그리고 서원건축이다. 불교건축 유교건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그랜드디자인은 똑같다. 대웅전 부처 자리가 대성전 공자 자리요, 해당 서원을 있게 하는 유학자 자리다. 성균관이나 항교는 국립인 까닭에 국가에서 사사로이 유학자를 추숭할 수는 없으니, 만고불변한 스승 공자를 배향하는 공간을 두니 그곳이 바로 대성전이다.
불교의 조사가 부처님을 피해 후미진 다른 곳으로 갔듯이 송자 역시 만동묘에 모신 신종 의종 두 황제를 피해 한쪽 후미진 곳으로 갈수밖에 없었다.
그랜드디자인이 그만큼 중요하다.
이 그랜드디자인을 모르니, 화양서원은 특이하다는 망발이 서슴없이 튀어나온다.
저 화양서원 어디가 이례적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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