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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제국대학6

朝鮮의 제국대학 vs. 朝鮮帝國의 대학 요즘 때아닌 경성제국대학 공부를 하고 있다. 그러던 중 정근식 외,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11)라는 책을 읽다가 도무지 웃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를 어떻게 끊어 읽을 것인가도 아니고, 거 참....이렇게 보면 예전 분들의 생각은 참으로 귀여운(?) 구석이 있었던 것 같다. 조선제국대학이라.....만약 그랬더라면 도하都下 각 신문에서 이라고 썼으려나? 이런 데서도 '정치적 올바름'을 찾다니 원. 그러나 '경성제국대학'이란 명칭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고 한다. 줄여 부르면 '경대京大'가 될 텐데 이미 교토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이 '교다이京大'라고 쓰고있지 뭔가. 그래서 경성제국대학은 자기네의 줄임말을 '성대城大[죠다이]'라고 했다고 한다. *** relat.. 2023. 7. 2.
경성제국대학 개교를 축하합니다~축하합니다~(뿌우) 1924년 5월 2일, 칙령 103호로 가 반포 시행되며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이 개교했다. 1924년 5월 9일 경성제국대학 예과豫科 제1회 신입생 선서식이 거행되고, 이튿날 경성제국대학 예과 제1회 입학식이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다음날인 12일 최초의 수업 시작, 곧 개강開講이 있었다. 그 다음날인 13일, 서울의 일본인 신문 에서는 1면의 거의 2/3을 할애해 경성제국대학 개설을 축하하는 광고를 실었다. 그런데 그 광고들을 보아하니 이들이 왜 대학 개설을 축하했는지 짐작이 간다. 남산 자락 혼마찌에 옹기종기 모여있던 서점은 "우와! 대학이 생겼으니 이제 대학 교재 수요가 생기렸다. 그리고 소설 같은 것도 좀 팔리겠지, 기왕이면 우리 가게에서 사가게 하자"겠고, 구두 가게와 모자 가게야 "크으!.. 2023. 6. 11.
경성제대 도서관 사실 이것도 굉장히 중요한 사안인데 전혀 분석되지가 않았다. 다행히 경성제대 도서관에 있던 구 장서는 현재 목록까지는 구비되어 얼마전 서울대에서 간행되었다. 아래에 1940년 당시 이병도가 바라보았던 경성제대 도서관에 대한 감회를 적어둔다. 조선일보 기사다. 이병도의 이야기는, 경성제대 도서관에는 도서관이 충실하다. 이를 공개해서 맘대로 볼 수 있게 해 달라. 조선은 고가의 책을 구입하기 어렵다. 경성제대의 도서관을 공개해 달라. 요컨대, 이병도 정도의 당시 조선인 중 탑클래스 연구자도 경성제대 도서관 장서에는 맘대로 접근이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조선인은 1940년 당시 경성제대 교수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조선인이 아무리 날고 뛰어도 학술적 성취를 이루기 힘들었다는 이야기와 같다. 2023. 5. 27.
1940년의 대학설립 앞서 필자가 서술한 대로 일제시대 조선총독부는 망하는 순간까지도 경성제대 외에는 대학 설립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그 명분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일본의 경우와 비교해도 형평성 문제에서 매우 문제가 커서 1940년대 교육제도가 그대로 이어지는 한 조선인은 대졸자를 거의 배출하지 못하고 저학력과 가난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기가 힘든 상태였다. 1940년 조선일보 기사를 보면, 1919년 삼일운동 좌절 후 시도된 민립대학 설립이 그때까지도 성공하지 못하고 계속 논의되고 있는 것을 본다. 관립대학은 설립되기 힘들다고 본 것인지, 민립대학에 대한 논의인데 역시 문제는 돈이었던 모양이다. 사실 이래서 저개발국 대학교육은 정부 주체의 호의가 없으면 본궤도에 올라가기 힘들다. 해방 이후에 날림이라 해도 대학과 대학생의.. 2023. 5. 26.
대한민국의 50-70년대 (6): 국대안 파동 (2) 국대안 파동이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에 대해서는 인터넷 서칭만 해도 다 나오기 때문에 많이 적지 않겠다. 여기서는 국대안 파동 진행과정에 대한 약간 언급과 함께 그 결과만 다루고자 한다. 1. 국대안파동은 미군정 당국의 목적도 그러했고 최종 결과물도 어디까지나 "미국식 교육제도에 입각한 종합대학" 건설이었다. 당시 경성제대와 국공립 전문학교는 전공별로 산재하였는데, 해방 이전에도 일본인 교수가 대부분이었고 한국인 교수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해방 이후 긴급 충원된 조선인 교수로 급조한 전문학교가 전공별로 산재해서는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미군정 당국의 판단은 기본적으로 옳다. 특히 미군정의 최종 목표는 일제하 전형적인 식민지 교육 형태를 띤 조선 교육을 미국식 6-3-3-4제를 도입하고 최종학부인 대학.. 2023. 3. 21.
대한민국의 50-70년대 (3): 해방 직전 조선인 인텔리 상황 일전 글에서 대한제국 멸망과 함께 구한국 공무원들이 조선총독부 관할 하급 공무원으로 대거 편입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소위 칙임관, 요즘으로 치면 고급공무원 군에는 일제시대 내내 조선인은 거의 없었고, 조선인 관료는 대개 말단을 전전했다. 요즘 일제시대에 "친일"을 했다고 욕을 먹는 당시 관료 대부분의 직급이 말단인 이유다. 이런 상황은 대학이라고 해서 다를 바가 없었다. 해방직전 조선에는 잘 알다시피 대학이라고는 경성제대 하나이고 나머지는 모두 "구제전문학교" 였는데, 이때문에 고급관료나 학자를 양성할수 있는 TO자체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애초에 45년 당시까지 문맹자가 절대 다수인 상황에서 이를 뚫고 최고학부까지 졸업해도 "학사"자격증을 가진 사람은 숫자가 극히 적었다는 말이다. 의대의 경우, 경.. 2023.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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