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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이상국집40

관행이라는 이름의 편리, 개선이라는 이름의 불편 녹祿을 받는 생활을 한 지도 몇 해가 지났다. 그러다 보니 각종 행정사무를 해야만 한다. 한데 그런 일을 하다 보면, "이건 아닌데" 싶은 순간을 만날 때가 있다. 어떤 일이라고 구체적으로 말할 수야 없지만, 예컨대 한 번 잘못 처리한 부분을 뒷사람이 그대로 따라서 하고, 그걸 또 그대로 따라서 하고... 그것이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뒷사람으로서도 할 말은 있다. 앞사람이 그렇게 해도 별 문제가 없이 일을 처리했고 오히려 이를 고쳤다가 누구한테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모르기 때문이며, 안 그래도 바쁜데 어구 하나하나를 따져가며 무언가를 고치는 과정이 더 고통스럽고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니 잘못임을 알면서도 하게 되고, 더러는 잘못이 있는지도 모르고 그저 할 뿐이다. 물론 나 스스로.. 2023. 2. 26.
때 벗기러 동래온천 가신 이규보 선생 처음엔 쓸쓸하니 찬 샘물 솟나 싶더만 / 瑟瑟初疑瀉泠泉 도리어 자욱하니 저녁 연기 나는 듯 / 濛濛還似起昏煙 산 속에 들어앉아 섣달 보내는 고승은 / 高僧坐度山中臘 나물 삶고 차 달일 제 불 필요 없으리 / 煮菜嘗茶不火煎 물 솟는 곳에 유황 있다는 말 믿지 않고 / 未信硫黃浸水源 되레 양곡에서 아침 해가 목욕하던가 싶었지 / 却疑暘谷浴朝暾 다행히 외진 곳이라 양귀비가 오지 않았으니 / 地偏幸免楊妃汙 지나는 길손 잠깐 씻어본들 뭐 어떠하리 / 過客何妨暫試溫 온천溫泉 밑에 욕탕지(목욕할 수 있게 만든 둠벙)가 있으므로 목욕은 반드시 여기서 하게 된다. - 전집 권12, 고율시, "박인석朴仁碩 공과 동래東萊 욕탕지浴湯池로 떠나려 하면서 입으로 부르다 2수 同朴公將向東萊浴湯池口占 二首" 이규보가 경주 민란을 진.. 2023. 2. 14.
술꾼의 술병 예찬에서 뽑아낸 세 가지 이야기 술병이여 술병이여 / 壺兮壺兮。 술을 채우니 한 말 두 되라 / 盛酒斗二。 따르고는 다시 채우니 / 傾則復盛。 어느 땐들 취하지 않으랴 / 何時不醉。 나의 몸을 높이고 / 兀我之身。 나의 뜻을 활달하게 한다 / 豁予之意。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니 / 或舞或歌。 다 네가 시킨 것이로다 / 皆汝所使。 내가 너를 따르는 것은 / 隨爾者予。 다만 다하지 않기 때문이라 / 但不竭耳。 - 후집 권11, 찬贊, "술병명酒壺銘" 1) 백운거사가 좀 과하게 술을 마시면 춤추고 노래부르는 것이 버릇이었던가 보다. 다행스럽게도 옷은 안 벗은 모양. 2) 두이斗二를 기존 번역은 '두 말'이라고 풀었다. 고려시대의 한 말[斗]을 지금 식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 에서 고려 도량형이 송나라 도량형과 같다고 한 걸 믿고 환산해보.. 2023. 2. 13.
낙방한 친구를 위로하는 이상국 시 한 편 "시험을 망쳤어 / 오 집에 가기 싫었어 / 열받아서 오락실에 들어갔어..." - 한스밴드, "오락실" 중에서 이 노래도 이젠 역사 속에 묻혀버렸다. 하지만 이 노랫가사만큼이나 낙방거자落榜擧子의 마음을 잘 드러내는 표현이 앞으로 또 나올 지는 모르겠다. 신라 원성왕 때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가 시행된 이래, 늦추어 보아도 고려 광종 때 과거科擧를 시행한 이래 이 땅엔 수많은 낙방생과 n수생들이 있었다. 우리의 이규보 선생도 물론 시험에 여러 차례 미끄러졌다. 그가 과거에 급제하기 전이었는지 뒤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고씨 성을 가진 그의 벗이 미역국을 먹고 말았다. 이에 이규보 선생은 (아마도 술을 사주면서) 그를 위로하는 시를 한 수 지어주었다. 시험장에서의 득실은 바둑과 같을지니 / 文場得失正如碁 한 번 실.. 2023. 2. 5.
거미줄 걸린 매미를 풀어주며 by 이규보 그동안 좀 격조했는데, 모처럼 짬이 난 김에 별밤 들으면서 한 장 그려보았다. --- 저 교활한 거미는 그 종류가 아주 많구나. 누가 너에게 교활한 재주 길러 주어 그물 만들 실로 둥근 배를 채웠는가. 어떤 매미가 거미줄에 걸려 처량한 소리를 지르길래 내가 차마 듣다 못하여 놓아 주어 날아가도록 했더니 옆에 서 있던 어떤 자가 나를 나무라면서, “오직 이 두 미물微物은 다 같이 하찮은 벌레들인데 거미가 자네에게 무슨 손해를 끼쳤으며 매미는 자네에게 무슨 이익을 줬기에 오직 매미만 살리고 거미는 그만 굶겨 죽이려 하느냐? 이 매미는 자네를 고맙게 여길지라도 저 거미는 반드시 억울하게 생각할 것이다. 매미를 놓아 보낸 것에 대해서 누구든 자네를 지혜롭다 하겠는가?” 하였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처음에는 이마.. 2022. 12. 8.
맷돌에 이파리 갈아 말차 드신 이규보 선생 요즘은 '별다방'에 가서 언제건 시켜먹을 수 있는 것이 '말차' 무엇무엇이다. 말차라떼, 말차 프라푸치노, 이젠 말차 슈패너에 말차 아포카토까지 나왔다나. 하지만 말차抹茶 곧 가루차는 그리 쉬운 물건이 아니었다. 수확 몇 주 전부터 차광막을 쳐서 그늘에서 기른 찻잎을 말려 줄기와 잎맥을 떼고 가루로 만들거나, 떡처럼 만들어 말린 단차團茶를 떼어내 가루내어야하는데 그 공이 보통 드는 게 아니다. 다른 건 그만두고라도 마른 이파리를 가루내려면, 그 시절에 믹서가 어디 있나? 맷돌에 가는 수밖에 없었다. 맷돌에서 나온 찻잎가루를 완碗에 담아 물을 부어 젓고 다시 뜨거운 물을 부어 마시는 게 옛날 송나라 때 차 마시던 방법이었다. 일본 다도가들이 다완에 말차를 풀어 젓는 모습을 상상하면 이해가 빠를까. 최승로가.. 2022.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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