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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전문6

손대지 말란 건 모름지기 손을 대야 하는 이유가 있다 나는 우리 문화재를 망치는 대표적 고질로 실체도 없는 원형 고수 뒷다리 잡기와 더불어 신주단지 애물주의 를 매양 꼽거니와, 특히 후자와 관련해선 매양 반문하거니와 손 대면 어때서? 하거니와 저 걸상 의자만 해도 그렇다. 저것이 어찌하여 백년이 지난 지금도 불쏘시개로 가지 않고 살아남았는지 경외는 한다만 만지지 마시오 Please do not touch 라는 경고문이 놓여 있길래 보자마자 짜증나서 치워버렸다. 묻는다. 만지면 어때서? 치워 버리고 맘대로 어루만지며 사진 맘대로 찍었다. 물론 저 경고가 표방하는 정신 자체까지 내가 폄훼하고픈 생각은 없다만 그렇다고 만지지 않는 데서 없던 경외심이 생긴단 말인가? 사진 찍는데 방해만 될 뿐이다. 붙일 필요도 없다. 또 붙이려거든 관람에 방해하지 않는 데 두든 .. 2023. 6. 29.
민립대 설립운동보다 더 주목해야 하는 것 현행 교과서에는 1919년 이후 민립대 설립운동은 실려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1919년 이후 민립대를 조선인들 손으로 세우려 했는데 일본의 방해로 실패했다. 대개 요지는 그것인데. 틀린 논지라고는 할 수 없다. 이 민립대 설립운동의 배경은 필자의 글에서 몇번 지적했지만, 대학령 때문이다. 원래 일본에는 제국대학 이외에는 대학을 둘 수 없었는데 대학령이 발표되면서 사립대학 등의 설립이 허가되어 대학교와 대학생 수가 크게 늘게 되었다. 대학령으로 새로운 대학이 설립되는 것보다 기존의 전문대학이 대학으로 승격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대학령에 따라 조선에도 사립대학을 두자-. 그것이 민립대 설립운동이다. 그 내역에 대해서는 필자 글에서 몇 번 쓴 것 같으므로 부연하지 않는다. 그런데-. 조선의 경우 이 민립.. 2023. 6. 10.
일제시대의 지식인: [1] 윤동주와 [2] 송몽규 이 두 사람은 고종사촌 지간으로 이들의 이야기는 연전 "동주"라는 영화를 통해 잘 알려져 있다. 윤동주와 송몽규의 일제시대 프로필을 보면-. 윤동주: 명동소학교-광명중학교-연희전문 (문과) 송몽규: 명동소학교-대성중학교-연희전문 (문과) 이다. 연희전문을 마친 후 둘은 일본유학을 택하는데 결국 조선땅에서는 그 이상의 대학 교육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조선에서 택할 수 있는 길은 경성제대예과를 들어가거나 (이 경우 연희전문을 나왔으므로 고등학교 과정을 다시 듣는 꼴이다) 아니면 경성제대 본과로 들어가는 것인데 후자의 경우 본과 신입생은 경성제대 예과생, 고등학교 졸업생 등으로 우선순위를 정해 놓았으므로 이들은 사실상 경성제대에서 더 공부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연전과 보전 졸업자들은 대학공부.. 2023. 5. 29.
일제시대 전문학교 및 학생 수 일제시대 전문학교 및 학생수. 조선인 학생수는 1937년 현재 2600명 정도로 대부분 사립 전문학교에 몰려 있다. 경성제대 예과 입학생의 절반과 공사립 전문학교 졸업생 2600명이 조선인으로 매년 대학진학이 가능한 숫자의 전부였던 셈이 되겠다. P.S.1) 1944년에는 연희전문과 보성전문이 문을 닫았다. 2023. 5. 27.
식민지시대 연전과 보전: 고졸자 그러나 후순위 앞서 식민지시대 고보를 고등학교로, 전문학교는 대학으로 많이 착각한다고 하였다. 이제 식민지 시대 전문학교에 대해 이야기 해 보자. 제일 유명한 양대 사학, 연전과 보전에 대한 이야기다. 연전과 보전은 졸업할 때 학사학위를 받지 못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학사학위는 대졸자에게만 주어지기 때문이다. 학사호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조선에서는 경성제대 졸업자 뿐이었다. 대학이 그거 하나였기 때문이다. 연전과 보전은 졸업장이다. 학위기가 아니라. 연전과 보전을 졸업하면 고등학교 졸업 학력이 인정되었다. 학력으로만 보면 경성제대 예과 졸업생과 동등했던 셈이다. 그렇다면 연전과 보전 졸업생은 경성제대 진학이 가능했을까? 거의 불가능했다. 이유는 경성제대 본과는 원칙적으로 예과졸업생 우선, 그 후순위로 구제 고등학교.. 2023. 5. 27.
대학이 경성제대 하나였다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것 흔히 일제시대 대학이 경성제대 하나였다는 것을 조선에 대한 식민지적 교육체제의 대표적 예로 거론하는데 실제로 일제시대의 "구제"교육체제를 분석하면 경성제대 문제 못지 않게 심각한 것이 "고등학교" 문제다. 일본의 구제 교육제도에서 "고등학교"는 45년 이후 "고등학교"와 성격이 다르다. 45년 이전 "고등학교"는 대학의 예과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를 진학하면 대학본과로 진학이 가능했다. 대학본과를 졸업해야 학사학위가 나오는 점을 감안하면, 고등학교는 대학교육으로 이어지는 가장 formal한 경로였던 셈이다. 이전에도 썼지만, 일본에는 45년 이전 전국에 총 38개 고등학교가 있었고 여기에서 매년 21만명의 고등학교 졸업생이 나왔다. 바로 이 고교 졸업생이 사실상 "대학입학의 예.. 2023.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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