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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일처제5

왕 또한 마누라는 한 명뿐, 부묘祔廟의 중요성 전반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견주어 고려시대가 적서 차별 양상이 극심하지는 않은 듯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이는 상대성 이론이라, 견주어 볼 때 그리 보인다뿐이지, 고려시대라고 적서차별은 예외가 아니었다. 이 적서 문제는 결국 혼인 양태에서 비롯하는데, 더 구체로는 남자 한 명에 부인이 한 명인 1부1처제 때문이다. 한국사에서는 적어도 기록으로 남은 흔적으로 볼 때는 철저한 1부1처제 사회였고, 남자한테 부인은 같은 시기에 한 명이 있을 뿐, 복수로 존재할 수는 없었다. 고려시대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어서 이쪽도 철저한 일부일처제였다. 어느 인터넷 사전을 보니 "고려시대에는 두 명의 정실 부인 외에 첩을 두고 서자를 두는 문화가 있었다. 그러나 서자를 적자와 다른 존재로 차별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 태종 때였다.. 2024. 1. 25.
일부일처제 monogamy와 그 베리에이션 variation (1) 타협 흔적에서 드러나는 한국사 특징 중 하나가 전 왕조를 통털어 혼인시스템이 철저한 일부일처제 Monogamy 사회라는 점이다. 이는 동시에 남자가 마누라를 두 명 이상 둘 수는 없었다는 뜻이다. 위선 저와 관련한 기록이 가장 확실한 조선시대를 보아도 조선왕 27명 중 정식 부인으로 동시에 둘 이상을 둔 경우는 단 한 명도 없다. 그 많은 왕의 여인들은 간단히 말해 정식 부인은 한 명 뿐이었고 나머지는 우수마발 첩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특정한 왕이 정식 부인을 둘 이상 둘 수 있으니 숙종은 셋이었고 숫자로는 둘, 하도 오래산 영조는 둘이었지만 동시에 마누라가 둘인 적은 없었다. 고려 왕조 역시 이러해서 초대 왕 왕건의 경우 창건주라는 특징에서 여러 왕비를 병렬로 둔 듯하나 개소리라 종묘 그리고 그의 무덤에 .. 2023. 5. 13.
단군조선 이래 한반도에 일부다처제는 존재한 적 없다 이 말은 하도 여러 번 했지만, 여전히 헷갈리는 사람이 많아 다시 정리한다. 조선시대, 그리고 그 이전 고려며 신라 백제 고구려 모두 왕을 필두로 하는 돈과 권력을 쥔 자들이 여러 여자를 거느린 일을 들어 일부다처제가 아니냐 하고, 실제 무슨 얼어죽을 일부일처제냐 하지만, 단언하지만, 단군 이래 이 땅에 일부다처제가 존재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렇다면 저 많은 마누라는 무엇인가? 세종은 마느래만 28명인가 29명을 거느렸다 하고, 그리하여 잦은 잠자리 여성 교체는 매독을 불러오지 않았는가 하는 구설이 있거니와, 마느래가 29명이라는 것과 그들 모두가 정식 부인이라는 것과는 제우스가 내려치는 번갯불과 여름철 반디 한 마리가 내는 빛의 차이만큼 왕청나다. 한 남자에게 같은 시기에 법률이 허용하는 정식 .. 2020. 12. 25.
왕건의 여인들과 일부일처제 하도 여러 번, 그것도 시도때도없이 이곳저곳에서 강조한 글이라, 다시금 이곳에서도 정리한다. 일부일처제와 일부다처제가 무엇인지 헷갈리는 사람이 많고, 후첩들을 지칭하는 봉작이 과연 생전에 얻은 것인지, 혹은 죽은 뒤에 얻은 것인지, 나아가 생전이라 해도, 왕건 생존시인지, 아니면 왕건 사후인지도 구별치 아니하니 각종 억설이 난무한다. 《고려사》 후비열전을 보면, 고려 건국주인 왕건의 여인들로 다음 29명이 적기되고, 그들의 생애가 간단히 정리된다. 1. 신혜왕후(神惠王后) 유씨(柳氏)2.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吳氏)3. 신명순성왕태후(神明順成王太后) 유씨(劉氏)4. 신정왕태후(神靜王太后) 황보씨(皇甫氏)5. 신성왕태후(神成王太后) 김씨(金氏)6. 정덕왕후(貞德王后) 유씨(柳氏)7. 헌목대부인(獻穆大夫.. 2018. 5. 7.
여자들이 반대해 무산된 일부다처제 한국처럼 강고하면서 억압적인 신분제 나는 유사 이래 본 적이 없다. 능력이 아니라 피로써 그 사람 생평을 절단낸 가족제도로 한국사만큼 엄혹한 데가 없다. 능력에 따른 제도 개혁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강고한 일부일처제를 혁파해야 했다. 하지만 한국사에서 일부일처제를 포기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모든 신분 문제는 일부일처제에서 비롯한다. 한데 내가 알기로 이 일부일처제를 법적으로 폐기하고자 한 심각한 움직임이 전근대에 딱 한번 있었다. 고려시대 원간섭기였다. 이를 당시 힘께나 쓰는 어떤 관료가 원나라 제도 관습을 들어 그 혁파를 과감히 주창하고 나섰다. 누가 반대했겠는가? 당시 재상 마누라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다. 정식 부인들이 들고 일어났다. 첩하고 내가 동급이라니? 이를 전하는 기록을 보면 당시 재.. 2018.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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