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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6

[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1) 정몽주가 죽다 살아난 봉래선 2006년 8월 28일은 월요일이었다. 이날 오전을 기해 나는 미리 준비한 관련 기사를 와장창 쏟아냈으니, 요새 언론계가 선호하는 표현을 빌리건대 이른바 [단독기사]들이었다.말 나온 김에 같은 단독기사라는데, [단독]이라 하면 밋밋하고, [특종]이나 [스쿱 scoop]이라 하면 좀 있어 보이는데, 내가 언제나 말하듯이 그 표현이 무엇이건 특종이라는 거 실상 암것도 아닌 언론계 지들 마스터베이션에 지나지 않으며, 일반은 그딴 데 아무런 관심도 없다.그 보도가 사실이냐 아니냐, 믿을 만 한가 아닌가? 그 파급력은 어떤가? 하는 이런 점들이 중요하지, 그런 기사를 누가 언제 가장 먼저 썼느냐가 무에 중요하겠는가? 나아가 단독 혹은 특종은 정의가 간단해서 다른 언론 혹은 기자가 쓰지 않은데 내가 쓴 기사를 말한.. 2024. 4. 4.
포은을 사랑한 우물 밖의 개구리, 마크 피터슨 교수님 오늘, 용인시 문화예술원 국제회의실에서 “용인 충렬서원의 역사적 가치와 활용방안“이란 주제의 학술회의를 개최했다. 학술회의를 위해 발표자와 토론자를 섭외하던 중, 발표자 중 한 사람인 신채용 선생님이 마크 피터슨(Mark peterson) 교수님께서 기조강연을 할 수 없겠느냐고 먼저 제안을 해주셨다. 마크 피터슨 교수님은 하버드대에서 한국학을 전공하시고, 브리검영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셨다. 평소 마크 피터슨 교수님 얘기를 들어왔던 터라, 그리고 외국 석학이 기조강연을 먼저 제안해주시다니! 포은을 너무 사랑하시고 정몽주 묘역에도 이미 방문해서 유튜브 영상도 찍으셨다는데, 당연히 O.K!! 그리고 오늘, 학술회의 당일! 한국말을 잘 하신다고 들었지만, 유창하게 정몽주의 단심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 .. 2023. 10. 27.
17세기 중반 용인 충렬서원 중건 위치에 대하여 1. 정몽주와 조광조 묘 중간지점에 죽전서원을 세우다. 정몽주는 성리학의 정치적․사상적 토대를 마련한 대학자로서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이자 고려 말의 대표적인 충신으로 존앙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정몽주를 배향한 조선시대의 서원은 16세기에 4곳, 17세기에 10곳, 18세기 이후에 3곳 등 전국에 18개소에 달하였으며, 그 가운데 사액 서원만도 9개소였을 만큼 끼친 영향이 큰 인물이다. 서원의 건립은 대상 인물의 성리학에 대한 깊은 조예가 있어야 하고 존경할 만한 명현(名賢)으로서 무엇보다 해당 지역과 일정한 연고가 있어야 하는데, 충렬서원은 정몽주의 성리학적 영향력과 명성과 더불어 모현읍 능원리에 묘소가 자리하였기 때문에 지역 유림과 후손들에 의해 서원이 건립되었으며, 사액을 받을 만큼 그 가치를 인.. 2023. 10. 24.
정몽주는 알지만, 충렬서원은 모른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 丹心歌(단심가) - 1. 용인과 포은 정몽주, 그리고 충렬서원 대한민국 사람 중에서 '단심가'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단심가'라는 제목은 몰라도, "이 몸이 죽고 죽어~ "로 시작하는 저 구절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 시조를 지은 사람은 고려를 대표하는 충신이자, 조선 성리학의 토대를 마련한 대학자로서 지금까지도 존경받고 추앙받고 있는 포은 정몽주이다. ( "정몽주"라는 이름 석자가 갖는 무게와 의미에 대해서는 두 말할 필요가 없다.) 포은 정몽주를 배향한 서원은 전국에 18개소에 달하였다. 이중에서 영천 임고서원, 개성 숭양서원, 용인 충렬서원, 포항 오천서.. 2023. 4. 23.
여색을 밝히고 명품 구찌에 환장한 정몽주 서거정의 를 보면 이런 글이 나온다. ○ 포은(圃隱) 정문충공(鄭文忠公)은 평생에 지절(志節)이 있고 남을 이간(離間)하는 말이 없었는데, 어떤 이가 농담하기를, “자네는 세 가지 과실이 있는데 알겠는가.” 하였다. 문충공이 대답하기를, “말을 해 보라.” 하니, 말하기를, 1) “남이 말하기를, ‘자네 친구들과 모여서 술을 먹을 적에 남보다 먼저 들어가서 맨 나중에 자리를 파하니, 술 마시는 것을 너무 오래한다.’ 하더라.” 했다. 문충공이 대답하기를, “진실로 그런 일이 있다. 젊어서 시골에 있을 적에 한 동이 술을 얻으면 친척과 친구들과 더불어 한 번 실컷 마시고 즐기고 싶었는데, 지금은 부귀(富貴)하여 자리에는 손님이 항상 가득하고 술통에는 술이 떨어지지 아니하니, 내가 어찌 조급하게 하겠는가.”.. 2022. 5. 29.
백암사 쌍계루에 부친 정몽주의 노래 장성 백암사 쌍계루에 붙이는 노래[長城白嵒寺雙溪寄題] [高麗] 정몽주(鄭夢周·1337~1392) / 기호철 譯評 지금 시를 지어 달라는 백암산의 중을 만나니붓을 잡고 시구 읊조리며 재주 없어 부끄럽소청수가 누각 세워 비로소 훌륭한 이름이 났고목옹이 기문을 지었으니 값어치 더욱 더하네노을빛 저 멀리 어렴풋이 저무는 산이 붉었고달빛이 왔다갔다 흔들리는 가을 물이 맑구나오래도록 인간 세상에서 근심으로 애타는 고뇌언제나 옷자락 걷고서 그대와 함께 올라갈까 求詩今見白巖僧, 把筆沉吟愧未能。淸叟起樓名始重, 牧翁作記價還增。烟光縹緲暮山紫, 月影徘徊秋水澄。久向人間煩熱惱, 拂衣何日共君登。 이 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권 36 장성현(長城縣) 불우(佛宇) 정토사(淨土寺)에 실려 있으며 《포은집(圃隱集)》 권2에 〈장성백암사쌍.. 2018.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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