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몽주와 조광조 묘 중간지점에 죽전서원을 세우다.
정몽주는 성리학의 정치적․사상적 토대를 마련한 대학자로서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이자 고려 말의 대표적인 충신으로 존앙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정몽주를 배향한 조선시대의 서원은 16세기에 4곳, 17세기에 10곳, 18세기 이후에 3곳 등 전국에 18개소에 달하였으며, 그 가운데 사액 서원만도 9개소였을 만큼 끼친 영향이 큰 인물이다.
서원의 건립은 대상 인물의 성리학에 대한 깊은 조예가 있어야 하고 존경할 만한 명현(名賢)으로서 무엇보다 해당 지역과 일정한 연고가 있어야 하는데, 충렬서원은 정몽주의 성리학적 영향력과 명성과 더불어 모현읍 능원리에 묘소가 자리하였기 때문에 지역 유림과 후손들에 의해 서원이 건립되었으며, 사액을 받을 만큼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묘소가 있는 용인에 정몽주를 배향한 서원의 건립은 당시 조광조의 묘(수지구 상현동 산55-1)와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묘가 있었으므로 일찍부터 서원을 세우기 위한 논의가 있었으나,
여러 사정으로 이루지 못하다가 이계(李𡹘)와 이지(李贄)를 비롯한 지방 유림의 노력으로 1576년(조선 선조 9)에 정몽주와 조광조의 묘도(墓道) 중간 지점인 죽전(竹田, 현 수지구 죽전동 원위치 미상)에 죽전서원(竹田書院)을 건립한 것이 충렬서원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죽전서원은 임진왜란 때 병화를 입어 소실되었다.
2. 포은선생 서원의 재건, 충렬서원으로 사액(賜額)받다.
정몽주의 배향을 위한 서원의 재건은 1605년 경기도 관찰사에 취임한 이정구(李廷龜, 1564~1635) 등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서원의 창건 배경과 재건 및 사액 과정 등이 「용인포은선생서원기(龍仁圃隱先生書院記)」 등에 잘 남아 있다. 「용인포은선생서원기」는 이정구가 1616년(광해군8) 10월 하순에 서원의 재실(齋室)에서 쓴 내용으로 <<월사선생집(月沙先生集)>>에 수록되었다.
(정몽주) 선생의 서원이 송도(松都)에 있는 것은 고택(古宅)이 있던 곳이기 때문이고, 오천(烏川)에 있는 것은 그 지역이 관향(貫鄕)이기 때문이고, 임고(臨皐)에 있는 것은 옛날에 살던 곳이기 때문인데, 유독 묘소 아래에만 서원이 없었다.
지난 병자년(1576, 선조9)에 선비들이 죽전(竹田)에 서원을 건립하여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선생을 배향하자고 발의하였으니, 이는 그곳이 두 분 선생의 묘소 중간 지점이기 때문이었다. 나의 선친과 고(故) 사인(士人) 이지(李贄)가 실로 이 일을 주장하였는데, 불행히도 임진년의 병화(兵火)로 그만 폐허가 되었으므로, 사림(士林)이 탄식하였다.
구성(駒城) 일대는 병화를 가장 심하게 입어 10여 년 이래 거주하는 백성이 없을 정도라 정암 선생의 묘소 아래에는 자손과 노복(奴僕)이 없어 나무꾼과 목동의 출입을 막지도 못하였다. 이에 선비들이 향화(香火)가 단절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묘소 곁에 사당을 세우자고 발의하였다.
을사년(1605, 선조 38)에 내가 경기 관찰사가 되어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고 현감(縣監) 정종선(鄭從善, 1551~1617), 진사(進士) 이시윤(李時尹)ㆍ정충전(鄭忠傳) 등과 의논하기를, “죽전서원을 중건하여 두 분 선생을 합사(合祀)한 것은 실로 선친의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힘이 없습니다. 정암 선생의 묘소 아래에는 이미 사당을 세웠는데 이 서원은 아직 세울 겨를이 없으니, 사문(斯文)의 허물일 뿐 아니라 실로 우리 자손들의 수치입니다.” 하고, 드디어 영중(營中)의 녹봉을 밑천으로 삼고 자손들 중 수령으로 있는 이에게 도움을 받았다.
그리하여 재목을 모으고 목수를 고용하여 5개월 동안 애쓴 끝에 사우(祠宇)가 완공되었고, 3년 뒤에 공사를 모두 마쳤다. 사우는 3칸이고 동(東), 서(西)의 재(齋)가 각각 2칸이다. 문루(門樓)가 3칸인데 위 칸은 강당이고 아래 칸은 문이며, 주방과 곳간도 대략 갖추어졌다.
(중략)
만력 병진년(1616, 광해군8) 맹동 하한(下澣)에 서원의 재실(齋室)에서 쓰다.
이상에서 서원기의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면, 세조 때의 명신인 이석형(李石亨)의 현손이며 현령 이계(李𡹘, 1528~1583, 모현읍 능원리에 묘가 있음)의 아들인 월사 이정구는 용인 모현에 위치한 정몽주 선생의 묘소 아래에만 서원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정몽주의 7세손이었던 용인현감 정종선(鄭從善, 모현읍 능원리에 묘가 있음), 진사 이시윤(李時尹)․정충전(鄭忠傳, 1567~?, 모현읍 능원리에 묘가 있음) 등과 함께 서원 건립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정몽주의 후손들로 임진왜란으로 죽전서원이 소실된 이후, 조광조를 배향한 심곡서원(深谷書院)이 이미 건립되었으나, 정몽주를 위한 서원이 세워지지 않았음을 자신들의 수치로 여겨 영중(營中)의 녹봉을 밑천으로 삼고 자손들 중 수령으로 있는 이에게 도움을 받아 재목을 모으고 목수를 고용하였다.
5개월 동안 애쓴 끝에 사우(祠宇)가 완공되었고, 3년 뒤에 공사를 모두 마쳤다. 당시 재건된 서원의 규모를 살펴보면, 사우는 3칸이고 동(東), 서(西)의 재(齋)가 각각 2칸, 문루(門樓)는 3칸으로 중층으로 지었는데 위 칸은 강당으로 사용하였고, 주방(廚房)과 곳간(庫舍)도 갖추었다.
공사를 마친 무신년(1608, 광해군 즉위년) 10월에 신위(神位)를 봉안하였고, 그해 겨울에 이시윤 등이 상소하여 사액(賜額)을 청하였다. 이에 광해군은 1609년 어제(御製)로 ‘충렬서원(忠烈書院)’이라 사액하였다. 이로써 충렬서원은 개성의 숭양서원과 영천의 임고서원에 이어 정몽주를 배향한 사액서원이 되었다.
3. 17세기 후반(1666-1667) 충렬서원 중건 위치에 대하여
충렬서원이 중건되고 유생들의 본격적인 참배도 시작되었다. 김방걸(金邦杰, 1623~1695)은 한양을 출발하여 구성의 묘 아래에서 숙박하고 다음날 여러 묘를 참배하였고, “포은정선생서원”을 배알하였으며 초상도 보았다는 기록을 통해 당시 유생들의 일종의 참배코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충렬서원은 죽전서원으로 처음 건립된 이후 여러 차례 중건되었는데, 17세기 후반 충렬서원은 다시 한번 큰 중수가 이루어진다. 현전하는 충렬서원 관련 문서 가운데 필사본으로 전하는 「충렬서원중수록(忠烈書院重修錄)」(용인시 향토유적 제26호)은 1666년 1월부터 1667년 6월까지 진행된 충렬서원 강당과 사우에 대한 중수의 제반 상황을 여러 사람의 중건 상량문을 통해 기록하고 있다.
각각의 상량문에서는 이전된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당시 여건과 문장가들의 작법으로 볼 때 그 정확성을 가늠하기 어려우나, 대략적인 지형의 서술로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구분 | 동 | 서 | 남 | 북 |
강당 중건 상량문 (조복양) | 정몽주 묘소 안을 비춘다 | 흐르는 물이 마치 아홉 구비 시내, 차가운 못 가을 달을 볼수 있다 | 정몽주와 같이 한번 죽은 남아가 몇 명인가(분묘군) | 늙은 솔이 창창하여 태고의 빛이다 |
사우 중건 상량문 (남용익) | 선생의 면목을 알기 바라고, 문수산이 드높다 | 지는 해가 시냇물 서쪽에 머뭇거린다 | 옛 사당의 남쪽에 향수산이 아른거리고 겹겹의 봉우리가 이어진다 | 문형산이 높이 솟아 있다 |
사우 이건 상량문 (김창협) | 성대한 묘소가 높은 산을 본떴다 | 떼지어 선 뭇 봉우리의 능선이 낮다 | 겹봉우리 빼어난 빛이 | 북두칠성(북극성) |
위 표는 1666~1667년간 시행된 중건 이후 서원에서 바라다 보이는 방향을 기록한 것으로, 동쪽은 정몽주 묘소와 문수산, 서쪽은 시내(현, 능원천, 오산천), 남쪽은 분묘군과 향수산에서 뻗어내린 겹겹의 봉우리, 북쪽은 멀리로는 문형산이나 하늘 등 대체로 트인 공간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이 위치로 추정되는 곳은 연일 정씨 후손을 비롯하여 지역주민들에 의해 “터골” 등으로 불리고 있어 조사지역 내에서 확인되는 유물의 분포양상과 수량으로 보아 건물지의 존재 가능성이 매우 높다. 특히, 1666~1667년간 시행된 중건 때에 기록된 여러 상량문에 기록된 조망권과 매우 유사한 지역으로 주목된다. 향후 이 일대에 대한 정밀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18세기 이후의 충렬서원의 위치와 관련해서는 조선후기 제작된 고지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영조 연간에 간행된 <해동지도(海東地圖)>, <팔도군현지도(八道郡縣地圖)>, 19세기에 간행된 <광여도(廣輿圖)>, 1842년 간행된 <경기지(京畿誌)>를 비롯한 <여지도(輿地圖)>, <지승(地乘)> 등 정몽주선생묘와 충렬서원을 표시한 지도이다.
이들 지도에는 산세의 형상이나 표기를 통해 정몽주묘와 충렬서원을 마주 보게 기록하였거나(<해동지도>, <광여도>, <지승>), 도로를 사이에 두고 표시되어 있기도 하고(<해동지도>, <지승> 등) 공간적인 이해가 가능하다.
특히 정몽주묘와 충렬서원이 위치하는 산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를 현재의 지형에 대비하면 정몽주 묘가 있는 문수산과 충렬서원이 있는 숫돌봉 사이에 형성된 곡간부의 오산천을 따라 교통로가 있는 점 등으로 볼 때, 이상의 지도들은 충렬서원이 현재의 위치로 이전한 이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인다.
* 본문 내용은 용인시, <용인 충렬서원 중건터 위치 비정을 위한 지표조사 보고서>, 2023 에서 발췌함
그동안 정몽주에 집중되어 있던 연구에서 벗어나 '충렬서원' 자체가 갖는 역사적 가치와 의미에 대해서 여러 좋은 선생님들을 모시고 발표와 토론의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위에서 얘기한 충렬서원의 17세기 후반 중건 위치는 어디인지, 지금은 잘 눈에 띄지 않지만, 조선 유생들에게 참배코스로 유행했던 충렬서원의 역사적 가치는 무엇인지,
이 모든 것을 오는 10월 27일(금) <용인 충렬서원의 역사적 가치와 활용방안> 학술대회에 오시면 알려드립니다.
많은 참석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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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3 - [우당당탕 서현이의 문화유산 답사기] - 정몽주는 알지만, 충렬서원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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