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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총12

천마도 바탕이 된 자작나무 껍질 천마총 천마도 장니 밑바탕 재료가 자작나무 껍질이다. 지금 평지에서 자라는 자작나무는 부러 관상용으로 심었지만 기후가 맞지 않아 잘 크지를 않는다. 앞 사진 속 자작나무는 2010년 5월 30일, 오대산 북대암으로 스님을 만나러 뵈러 갈 적에 그 정상부에서 만났다. 나는 자작나무만 보면 껍질을 홀라당 벗기곤 한다. 껍질은 이처럼 잘 벗겨진다. 그림을 그리려면 속껍질까지 홀라당 벗여야 하지만 그러면 나무가 죽어 맛배기만 본다고 벗겨봤다. 이 자작나무 껍질을 북대암에서 보니 이런 식으로 벗겨서 말리고 있었다. 아마 무슨 약재나 차로 쓰는 게 아닌가 했다. 혹여 기능을 아시는 분은 교시 바란다. (2014. 4. 9) 2023. 4. 6.
천마총 황남대총 발굴은 이맹희 아이디어였다 현재 보문단지를 그때 만든 다음 그후 조금씩 건물을 더 지어서 지금처럼 조성한 것이다. 원래 정부의 제안은 보문단지 호숫가에 도로를 만들고 건물을 전부 산쪽으로 붙여서 짓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할 경우 호텔 등에서 호숫가로 가려면 찻길을 건너야 할 뿐더러 결국 호수와 멀리 떨어진 건물 일대의 땅은 쓸모가 없어진다. 이때는 내가 고집을 피워서 결국 지금대로 호숫가에 건물을 짓고 길을 건물 밖으로 내도록 했다. 호수를 다 파고 나서는 또다른 문제가 생겼다. 그 호수가 단순한(이상 238쪽) 위락용 호수가 아니라 농업 용수를 제공하는 호수이다 보니 정작 봄, 여름철이 되면 농사 짓는데 쓰느라 물이 다 빠져나가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 위에 다시 하나의 댐을 더 만들어서 물을 저수하기로 했.. 2021. 1. 31.
대중고고학 문을 연 무령왕릉 고고학과 문화재를 관광과 착목한 경주관광개발계획 전주곡은 무령왕릉 발견 발굴이었다. 무령왕릉 발굴은 대히트였다. 하지만 놓친 게 있었다. 대중매체, 특히나 발굴과정을 생생히 담은 영상을 촬영하지 못했다. 이 점이 두고두고 정권에는 한이 됐다. 무령왕릉 발굴단장 김원룡이 당시 문화부 장관 윤주영한테 불려가서 쿠사리 찐밥을 먹었다. 테레비 왜 안 불렀느냐? 이걸 이해해야만 이듬해 닻을 올린 경주관광개발계획을 이해한다. 무령왕릉 실패를 거울삼아 천마총 황남대총 발굴은 티비가 동원됐다. 그 발굴소식은 대한뉘우스를 타고 전국으로 전파됐다. 오늘 신라문화동인회 내 발표 중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2015. 10. 11) *** 이런 반성은 무령왕릉 발굴 직후 박정희 정부가 의욕으로 추진한 경주관광개발계획과 그 일.. 2020. 10. 12.
김재원은 왜 천마총 황남대총 발굴을 반대했던가? (1) 마침내 칼을 빼고 박정희 정권이 1971년 수립하고, 이듬해에 본격 추진하기 시작한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은 한국고고학 지형을 바꿔 놓았으니, 다른 무엇보다 문화재관리국에 의한 국가주도 발굴이 확실한 우위를 점거하는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도 그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당시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고고학 발굴은 그 규모나 건수에서 미미하기 짝이 없었으니, 그나마 그런 미미한 발굴은 국립박물관이 시종 주도했고, 몇몇 대학에서도 그 나머지를 농가먹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경주관광개발계획은 그 양대 축이 보문관광단지 개발과 경주 시내 신라유적 정비였기에, 특히 후자와 관련해 대대적인 국가주도 발굴이 있을 수밖에 없었고, 그 추진을 위해 문화재관리국이 동원되기 시작한 것이다. 범정부 기구인 이 종합개발계획은 시종일관 청와대가 주도했고, .. 2019. 2. 3.
박정희시대 문화재 특종을 일삼은 기자 우병익 January 25, 2017 내 페이스북 계정에 나는 아래와 같이 썼다. 경주박물관 도교 강연을 마치고 저녁을 겸해 우병익 기자를 인터뷰했다. 1933년 경주산, 1950년 7월 15일 육이오 학도병 1기, 열여섯에 좌익들에게 아버지를 잃었다. 1962년 한국일보 입사 이래 1980년 신군부에 의한 언론 통폐합으로 연합통신으로 옮겨 1985년 정년퇴직하면서 기자를 떠났다. 33년에 달하는 기자생활을 오로지 경주 주재로 있었다. 자칭 타칭 '동해안 특파원', 커버하는 지역이 북으로 울진, 동으로 울릉도까지였기 때문이라 한다. 그는 한국 언론사에선 문화재 전문기자 선두에 속한다. 경주관광개발 당시 내내 문화재 발굴현장 취재를 도맡아 각종 특종을 낚아냈다. 1970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문명대를 대동하고는 반.. 2019. 1. 26.
사진 석장으로 보는 경주 천마총 발굴 이야기 사진 석장으로 1973년 경주 천마총 발굴 이야기를 좀 하려 한다. 가운데 흰모자 쓴 이가 발굴단장 김정기 문화재연구실장이다. 그를 중심으로 왼편으로 차례로 소성옥·김동현·윤근일, 오른편으로 박지명·최병현·지건길·남시진이다. 이들이 천마총과 황남대총을 파제낀 사람들이다. 저들 중에 김정기 소장은 몇년 전 작고했고, 박지명 선생은 그보다 먼저 갔다. 김정기 소장이야 따로 설명이 필요없고, 박지명 선생이 여러 일화를 남겼으니, 부산 복천박물관 하인수 관장에 따르면 부산대 건축학과와 사학과를 졸업하고 나중엔 부산박물관 학예실장으로 정년한 사람으로 "부산 오룬대고분 발굴에서 유구를 그리드법(grid法)으로 처음으로 실측한 분"으로서, "한평생 기인(?)으로 사신 분"이라고 한다. 천마총 황남대총 발굴에서도 실측.. 2019.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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