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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471

엄비 칠궁 현판을 쓴 이완용 한때 독립문 한글 한자 편액을 누가 썼는지에 관해 시끌시끌했던 적이 있다. 천하의 매국노 일당 이완용(1858~1926)이 다른 문도 아니고 '독립문'의 편액을 썼다니 라며 놀라고 또 부정하며 화내는 분이 많았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독립문을 세우던 1890년대 당시(그로부터 십여 년 뒤가 아니라) 그의 정체를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조선은 미국같이 되기를 바라오"라고 연설했던 독립협회 창립발기인, 이완용 말이다. 어쨌거나, 이완용은 편액서, 곧 현판글씨에도 제법 능했던 건 맞는 것 같다. 높이 거는 현판의 특성상, 작은 글자를 확대해서 새겼다간 획이 지나치게 가늘고 힘없어 보인다. 그래서 현판에 새길 글씨는 다른 붓글씨보다 굵고 강하게 써야 한다. 이완용이 덕수궁 숙목문肅穆門, 김천.. 2024. 9. 5.
병자호란 때 이야기라는데 사대부 집안 아녀자들이 강화에 많이 피란 와 있었다 한다. 다들 오랑캐가 오면 자진하겠다느니 하는데, 한 사람만 "그때 가봐야 알 일"이라고 했다. 그러자 다들 그를 욕했다. 예친왕이 이끄는 청나라 수군이 강화에 왔다. 그러자 그때 가 봐야 알 일이라고 한 그 한 사람만 끝까지 항거하다 죽음을 맞이했고, 그를 나무랐던 이는 그러지 못했다고 한다. *** editor's note ***그래서 나는 지금 정의를 부르짖는 자들을 믿지 않는다.목이 칼이 들어와도 절개를 지키는 이는 딴 사람들이다. 2024. 8. 28.
조선 양반님네들의 아주 좋지 아니한 버릇 책 앞장에 찍힌 전 주인의 장서인을 그냥 두지 않는다. 도려내고 문지르고...그것까지면 모르겠는데 그 자리에 자기 도장을 찍는다.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 덧찍은 인영印影도 사라진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책이 거쳐온 역사는 깡그리 잊혀지고 마니, 이 어찌 매우 나쁜 버릇이라 하지 않을손가!사진은 안평대군이 원글자를 쓴 경오자를 본뜬 훈련도감 목활자본을 목판에 뒤집어붙여 새긴 복각판을 17-18세기쯤 인쇄한(복잡하지만, 금속활자>목활자본>목판본) 《주문공교창려선생집》의 일부. 솜씨가 좀 거칠지만 그래도 안평대군 글씨의 흔적이 간간이 보인다. *** editor's note ***  장서인을 없애거나 다른 것으로 교체하는 경우의 수는 많다. 가장 대표가 도둑질이다. 이때 도둑한 사람이 그 흔적을 지우고자 장서인.. 2024. 8. 22.
육당, 그의 글씨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포하노라" 삼일절마다 되뇌이고, 한때는 국어교과서에도 실린 첫 구절이다. 내가 고등학교에서 배울 때는 이 글의 저자를 '민족대표 33인'이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 이유를 국어 선생님이 이렇게 얘기했더랬다. 지은이의 삶 때문이라고. 그 틀을 잡은 지은이-지금은 '공약 3장'도 함께 지은 것으로 여겨지는-가 바로 육당六堂 최남선(1890-1957)이다. 젊어서 동경삼재東京三才란 찬사를 받을 만큼 천재성을 발휘한 그였다. 그랬기에 개화기부터 일제강점 중기까지 한국 문학, 출판, 역사연구, 언론 등 실로 각 분야에서 그의 이름은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중년 이후, 그는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 같은 삶을 살았다. 그는 그렇게 살았다. 꽤 오래 산 인물임에.. 2024. 8. 20.
소암 선생이 목은의 시를 쓰다 소암素菴 현중화玄中和 선생(1907~1997)이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시를 쓰다어제 영명사 지나다가잠깐 부벽루 올랐다네성은 비고 한 조각 달만돌은 늙고 구름은 천 년기린마 가고 오지 않는데천손은 어디서 노니는지돌계단에 기대 긴 한숨 쉬니산은 푸르고 강에 배 흐르네昨過永明寺 暫登浮碧樓 城空月一片 石老雲千秋 麟馬去不返 天孫何處遊 長嘯倚風磴 山靑江舟流(일부 원시와 다른 글자가 있으나 글씨 쓰신 대로 옮겼다)서귀포 소암기념관에서 2024. 8. 11.
심동주, 한국근대미술사가 주목해야 하는 인물 윤동주(1917~1945)는 알아도 '심동주'는 아마 대부분 모를 것이다. 하지만 근대 한국미술사를 봤다면 한 번쯤은 스친 이름이기도 할 것이다. 동주東洲는 호고 이름은 인섭寅燮, 곧 동주 심인섭(1875~1939)이 바로 그다. 1875년 을해생이니 관재 이도영(1884~1933), 이당 김은호(1892~1979)보다 선배인데, 희한하게 대중에겐 잘 알려지지 않았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설명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근대기 서화가로 호는 동주(東洲), 본관은 청송이다. 일찍이 일본·중국 상해 등지를 왕래했다. 1921년 서화협회 회원이었으며, 1922년과 1923년에는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했다. 그림과 글씨에 능했으며, 특히 묵죽, 묵난 등을 잘 그렸다.1921년 서화협회전이 생기면서 서화협회 정회.. 2024.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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