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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486

육당, 그의 글씨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포하노라" 삼일절마다 되뇌이고, 한때는 국어교과서에도 실린 첫 구절이다. 내가 고등학교에서 배울 때는 이 글의 저자를 '민족대표 33인'이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 이유를 국어 선생님이 이렇게 얘기했더랬다. 지은이의 삶 때문이라고. 그 틀을 잡은 지은이-지금은 '공약 3장'도 함께 지은 것으로 여겨지는-가 바로 육당六堂 최남선(1890-1957)이다. 젊어서 동경삼재東京三才란 찬사를 받을 만큼 천재성을 발휘한 그였다. 그랬기에 개화기부터 일제강점 중기까지 한국 문학, 출판, 역사연구, 언론 등 실로 각 분야에서 그의 이름은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중년 이후, 그는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 같은 삶을 살았다. 그는 그렇게 살았다. 꽤 오래 산 인물임에.. 2024. 8. 20.
소암 선생이 목은의 시를 쓰다 소암素菴 현중화玄中和 선생(1907~1997)이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시를 쓰다어제 영명사 지나다가잠깐 부벽루 올랐다네성은 비고 한 조각 달만돌은 늙고 구름은 천 년기린마 가고 오지 않는데천손은 어디서 노니는지돌계단에 기대 긴 한숨 쉬니산은 푸르고 강에 배 흐르네昨過永明寺 暫登浮碧樓 城空月一片 石老雲千秋 麟馬去不返 天孫何處遊 長嘯倚風磴 山靑江舟流(일부 원시와 다른 글자가 있으나 글씨 쓰신 대로 옮겼다)서귀포 소암기념관에서 2024. 8. 11.
심동주, 한국근대미술사가 주목해야 하는 인물 윤동주(1917~1945)는 알아도 '심동주'는 아마 대부분 모를 것이다. 하지만 근대 한국미술사를 봤다면 한 번쯤은 스친 이름이기도 할 것이다. 동주東洲는 호고 이름은 인섭寅燮, 곧 동주 심인섭(1875~1939)이 바로 그다. 1875년 을해생이니 관재 이도영(1884~1933), 이당 김은호(1892~1979)보다 선배인데, 희한하게 대중에겐 잘 알려지지 않았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설명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근대기 서화가로 호는 동주(東洲), 본관은 청송이다. 일찍이 일본·중국 상해 등지를 왕래했다. 1921년 서화협회 회원이었으며, 1922년과 1923년에는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했다. 그림과 글씨에 능했으며, 특히 묵죽, 묵난 등을 잘 그렸다.1921년 서화협회전이 생기면서 서화협회 정회.. 2024. 8. 10.
서른넷에 이조판서를 꿰찬 민영달 금관조복을 갖춰입은 서른네살 젊은이(?) 초상화다. 그런데 금관에 붙은 선은 다섯개요 관직은 정2품 이조판서다. 지금으로 치면 행정안전부 장관인 셈인데, 34살에 엄청 출세한 그는 누구인가. 우당 민영달(1859~1924)이란 인물이다. 명성황후 조카뻘이었던 그는 조선 말 척족세도에 편승해 관찰사, 각조 판서를 두루 거쳤으며, 특히 이재理財에 밝았다는 평을 들었다. 그러나 을미사변 이후엔 칩거에 들어갔고, 경술국치 이후 일제가 남작 작위를 내렸으나 끝내 거부하였다. 세도를 부리던 민씨 일족 중에선 깨끗한 이름을 남긴 셈이다. 이 초상은 주인공 포즈나 필치로 보아 석지 채용신(1850~1941) 작품임이 거의 분명하다. 다만 이름이 안 쓰여있을 뿐. 옆에 적힌 경자庚子는 1900년인데, 민영달이 34세 되.. 2024. 8. 9.
[서예가 이완용] (11) 윤치호와 이완용 생각보다 글이 길어졌다. 이완용의 글씨를 보고 그 소감과 비평을 한다는 것이, 어느새 근대 한국 서예사 이야기로까지 넘어갔다. 일단은 여기서 그치려고 한다.하지만 하나 짚고 넘어갔으면 하는 점은 이야기하련다. 이완용이 매국賣國했던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를 한국 근대미술사의 등장인물로는 여겨야 그 안의 많은 의문점이 해결되고 또 풍성한 이야기를 끄집어낼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그의 일기에 나오는 서화미술원 언급만으로도 이제까지 알려진 사실과는 약간 다른 걸 논할 수 있겠으니 말이다. 그런 작업을 이완용이 죽일 놈(이미 죽었지만)이라고 해서 미뤄두어야 할까.역시나 친일파였던 윤치호(1865~1945)가 남긴 는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 한국 근현대사 연구의 필수 텍스트 중 하나로.. 2024. 8. 8.
[서예가 이완용] (10) 서화전 보러 간 일당一堂 우연히도, 이완용의 일기가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국립중앙도서관에서 원문서비스 제공을 해주고 있는데, 1911년 일기만 남아있어 아쉽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인가.잠깐 훑어보다가 재미있는 기사 한 토막을 건졌다. 1911년 3월 2일 목요일(음력 2월 22일), 음산한 날이었다.  성내 서화가 제인諸人이 서화미술원을 만들고 서화를 진열하여 공람供覽케 하고 겸하여 내게 (와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므로 오후 2시에 원院에 갔는데, 여러 화사畵師와 필객筆客 모두 당세의 이름있는 사람들이었다.이때에 가서 본 사람들은 평재 박제순(1858-1916), 우정 고영희(1849-1916), 낭전 조중응(1860-1919), 박기양(1856-1932) 대감, 김종한(1844-1932) 대감이었다. 저녁이 다 되어.. 2024.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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