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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491

밀양 영남루에 을축년에 세운 일본식 밀양박씨 중시조비 웬 일본식 석물들인가 했더니 비석에 '밀성대군지단密城大君之壇'이라 새겨져 있었다. 신라 경명왕의 아들로 '밀성대군'이었던(신라 때 왕의 아들을 '대군'으로 봉한 적이 있는지는 잠깐 젖혀두고) 밀양박씨 중시조 박언침이란 분을 기리는 단소壇所다. 근데 아무리 봐도 일본풍 산소 느낌이라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비석을 몇 자 읽어보니, 비를 세운 때가 신라기원 1982년 을축, 곧 1925년이다. 그리고 비 앞의 전서를 쓴 이는 완산完山 이강李堈이라 했으니 고종황제의 아들 의친왕이다. (2021. 10. 27) 2024. 10. 28.
저 놈을 '풍덩'하지 않고 뭐하는 게야 저 놈을 '풍덩'하지 않고 뭐하는 게야 고려사나 고려사절요를 보면 유달리 '물에 던져버리는' 형벌이 많다. 허리가 꺾여 가마솥에 들어가 물에 던져진 의종, 동지들과 함께 묶여 강물에 던져진 만적, 유배를 가다가 바다에 던져진 김경손, 길흉을 잘 점친다고 바다에 던져진 백량... 조선시대에는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가마솥에 들어가는 팽형烹刑 빼고) 물에 던져지는 형벌이 없었다. 삼국시대에도 고구려 중천왕 후궁인 관나부인貫那夫人(?~251)이나 익선의 아들 정도밖에 모르겠는데 유달리 고려시대에 이런 수장형水葬刑이 많았던 것은 어떤 이유일지? 인류학적으로 이건 어떤 의미가 있을지? 2024. 10. 25.
편지봉투 쓰는 데도 격식이 있나니 지금까지도 근대 문인이라 해서 한 손가락에 꼽히는 인물 중 한 분인 상허 이태준(1904-?). 글 쓰는 법을 가르치는 《문장강화》로 이름이 높지만, 편지 쓰는 법을 일러둔 《서간문강화》란 책을 낸 일은 잘 알려져있지 않다. 요즘이야 손편지 쓰는 분이 드물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e-mail이나 문자 카톡이란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오직 종이에 글자를 적어 부치는 편지, 엽서, 간찰만이 멀리 있는 이에게 소식을 전하는 수단이었다.그런데 그걸 보내려면 봉투에 넣어야 할 터.  거기 받을 사람의 주소를 제대로 적고 우표도 붙이고 해야 하는데 때에 따라, 봉투 종류에 따라 적는 문구나 방법이 달라진다.  헌데 당시에도 그 격식이 헷갈리는 분이 적잖았던 모양이다.  이에 상허 선생은 한가지 수를 낸다.  자신이 받.. 2024. 10. 23.
편집의 힘, 증보문헌비고의 경우 보는 사람에 따라 대한제국 최후의 업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거대한 유서類書 .정말 다행스럽게도 국역이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나와 지금 서비스 중이다.뒤적뒤적거리는데, 생각보다 재미있다.특히나 원문을 살짝살짝 떼내어 짜깁기하는 그 솜씨가 예술이라 까딱 잘못하면 무슨 말인지 헷갈릴 뻔 하기도 한다.예를 들면, 그 유명한 최승로의 를 인용한 이 부분을 보자.정광正匡 최승로의 상소에 이르기를, "서인庶人 백성이 문채文彩를 입지 못하는 것은 귀천貴賤을 구별하고 존비尊卑를 분변하기 위한 까닭입니다. 문채 있는 물건은 모두 토산土産이 아니니, 사람마다 입는다면 사치스럽고 참람됨이 절도節度가 없게 되고 재물을 소모하는 한탄이 있을 것입니다. 에 이르기를, '천자天子는 당堂이 9척尺이고 제후諸侯는 당이 7척이라'고 하여.. 2024. 10. 23.
약산 김원봉이 남긴 책은 지금 어디에 1983년 겨울, 서울 인사동 통문관에서 작은 전시가 하나 열렸다. - 말 그대로 당대 명인들이 누구 주려고 사인한 책 265권을 모아 보여주는 전시였다. 통문관쯤 되니까 가능한 전시였겠다. 도록 말고 얇은 카탈로그를 만들었는데, 세상에나 통문관주인 산기 이겸로(1909-2006) 선생이 직접 철필로 일일이 베껴 롤러를 민 등사본이었다. 인사동 어느 헌책 좌판에 널부러져있기에 율곡 선생 한 분과 바꾸어왔다. 그리고 제주에서 펼쳐본다. 옛 판식에 써서 조선시대 필사본 느낌마저 나는데, 그 내용을 보면 문득 황홀해지기까지 한다. 위창 오세창(1864-1953)에게 백범 김구(1876-1949)가 드린 , 조선기념도서출판관에서 상허 이태준(1904-?)에게 증정한 같은 이름들을 보자니... 지금도 이 책들이 .. 2024. 10. 15.
열다섯살 고종의 글씨 1866년(고종 3) 가을 어느날 , 15세 먹은 소년 임금은 친히 붓을 들어 '실사구시實事求是' 넉 자를 썼다. 그리고 이를 홍문관에 내렸다. 이 글씨는 이후 동원 이홍근(1900~1980)을 거쳐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이 된다. 이때 이미 주연珠淵이란 호를 쓴 모양이다. 그런데 나이를 감안하더라도 필재筆才가 별로 없어 보이는 글씨다. 나름 단정하게 힘을 주려 한 흔적은 보이지만, 글자와 글자 사이 균형이 맞지 않고 구할 구求는 차조 출朮인 줄 알 뻔했다. 생生 아버지 흥선대원군(1820~1898)의 글씨처럼 추사체 느낌이 강렬한 것도 아니고, 어설프다? 적당한 표현이 생각나지 않는다. 하기야 이때 이미 명필이었어도 이상한 일이었겠지만. 병인양요가 일어나는 것이 1866년 10월이다. 아마도 그 직전인 .. 2024.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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