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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詩 & 漢文&漢文法553

맥상상陌上桑 : “내 나인 스물엔 모자라고 열다섯엔 남느니” 맥상상(陌上桑) 漢樂府 日出東南隅 해가 동남쪽에서 떠서照我秦氏樓 우리 진씨 집 누대 비추네秦氏有好女 진씨에겐 아리따운 딸 있어自名爲羅敷 이름을 나부라 하는데羅敷善蠶桑 나부는 누에치기 잘 하네采桑城南隅 뽕을 성 남쪽에서 따는데靑絲爲籠係 푸른 실로 바구니 줄로 삼고桂枝爲籠鉤 계수 가지로 바구니 고리 삼았네頭上倭墮髻 머리엔 왜타계 올리고耳中明月珠 귀엔 명월주 달았네緗綺爲下裙 담황색 비단으로 치마 해 입고紫綺爲上襦 자주색 비단으로 저고리 삼았네行者見羅敷 길 가는 이 나부를 보면下擔捋髭須 짐 내리곤 수염 만지고少年見羅敷 소년이 나부를 보면脫帽著帩頭 모자 벗어 묶은 머리 내 보이네耕者忘其犁 밭가는 이 쟁기질 잊어버리고鋤者忘其鋤 김매는 이 호미질 잊어버리고來歸相怨怒 집에 돌아와 마누라와 성내고 다투니但坐觀羅敷 오직 .. 2018. 2. 26.
“다른 데 시집가소” 진림(陳琳)의 음마장성굴행(飮馬長城窟行) 음마장성굴행(飮馬長城窟行) 진림(陳琳) 1. 출전 : 《옥대신영玉臺新詠》 卷一 2. 작자 진림(陳琳, ?~217)은 한말(漢末) 문학가자 “건안칠자(建安七子)” 중 한 명이다. 일찍이 대장군 하진(何進)의 주부(主簿)를 지내다가 하진이 죽자 원소(袁紹)에게 귀부하여 서기(書記)를 담당했다. 원소가 패몰(敗沒)하자 이번에는 조조(曹操)에게 귀의하니 사공군모좨주(司空軍謀祭酒)가 되어 기실(記室)을 관장하고 나아가 문하독(門下督)이 되었다. 원래 문집 10권이 있었으나 모두 망실되고 그의 시작품으로 겨우 4수가 현존할 뿐이다. 明人이 《진기실집陳記室集》 1卷을 집록(輯錄)하니 이것이 후세에 전한다. 그의 관적(籍貫)에 대해서는 허다한 책에서 모두 강소(江蘇) 양주사람(揚州人)이라 하나 잘못이다. 《자치통감資治.. 2018. 2. 26.
“그림자 되어 그대 따르련만” : 부현(傅玄)의 거요요편(車遙遙篇) 거요요편(車遙遙篇) 부현(傅玄) 출전 : 《옥대신영玉臺新詠》 卷九 작자 傅玄(217~278)에 대해서는 晉書 卷47 列傳 第17에는 그의 傳記가 그의 아들 부함(傅鹹), 부함의 아들 부부(傅敷), 부함의 종부제(從父弟) 부지(傅祗)와 함께 合傳되어 있다. 傅玄의 진서 열전은 밑에다가 첨부한다. 車遙遙兮馬洋洋 수레 아득아득 말은 느릿느릿 追思君兮不可忘 당신 그리며 잊을 수 없네요君安遊兮西入秦 당신 왜 떠나 서쪽 진으로 가셨나요 願爲影兮隨君身 그림자 되어 당신 따르고 싶건만君在陰兮影不見 당신 그늘에 계시니 그림잔 보이지 않네요 君依光兮妾所願 당신 햇볕에 서소서 첩은 바랍니다 傅玄列傳(出自《晉書》) 傅玄, 字休奕, 北地泥陽人也. 祖燮, 漢漢陽太守. 父幹, 魏扶風太守. 玄少孤貧, 博學善屬文, 解鐘律. 性剛勁亮直.. 2018. 2. 26.
귀국하는 신라법사를 전송하며 : 송신라법사환국(送新羅法師還國) 아래 시에 나오는 신라법사는 누구인가? 작자 손적의 활약 연대로 보아 신라로는 경덕왕 재위 무렵에 당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고승인 듯하다. 全唐詩 卷 第118에 손적(孫逖)의 다른 작품과 함께 수록됐다. 송신라법사환국(送新羅法師還國): 귀국하는 신라법사를 전송하며 異域今無外 이역은 지금엔 바깥도 없는데高僧代所稀 고승은 대대로 드물기만 하네苦心歸寂滅 고심 끝에 적멸로 귀의하니宴坐得精微 연좌하여 정미함 얻었네持鉢何年至 탁발한 지 몇 년인가?傳燈是日歸 등불 전하러 오늘 돌아가네上卿揮別藻 상경께선 특별히 글 지어두고中禁下禪衣 궁중에선 선의 내리셨네海闊杯還度 바단 넓은데 통나무배로 돌아 건너니 雲遙錫更飛 구름 멀어 지팡이 다시 날리네此行迷處所 이번 행차 갈 곳 모르는데何以慰虔祈 어떻게 위로하며 경건히 기도해야.. 2018. 2. 26.
野望은 어떻게 '야망'이 되었나? : 왕적전(王績傳)을 겸하여 요즘 틈나는 대로 전당시(全唐詩)를 훑어 보고 있거니와, 그 권37에는 隋末~唐初 교체기를 살다간 왕정(王績)이란 사람이 남긴 시가 集積해 있으니, 우선 그의 행적을 보면 생몰 연대가 585~644년이니 수 문제 시대에 태어나 당 태종 연간에 죽었음을 안다. 字를 무공(無功)이라 했거니와, 《全唐文》 卷123에 수록된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서는 왕적이란 사람은 부모가 있으나 친구가 없어 스스로 그를 위해 字를 지어 가로대 무공이라 했다(王績者, 有父母, 無朋友, 自爲之字曰無功焉)고 한다. 舊唐書 卷192 列傳 第142 隱逸 항목에 수록된 그의 전기는 다음과 같다. 강주(絳州) 용문(龍門) 사람으로 어릴 적에는 李播ㆍ呂才와 더불어 莫逆하게 사귀었다.隋 大業 연간에 孝悌廉潔에 應하여 천거되고 揚州六合縣.. 2018. 2. 26.
하늘 끝이 보고파 : 왕지환(王之渙)의 등관작루(登鸛鵲樓) 관작루(鸛鵲樓)에 올라[登鸛鵲樓·등관작루] [唐] 왕지환(王之渙·688~742) 白日依山盡 밝은 해 산에 기대어 저물고黃河入海流 황하는 바다로 흘러들어가네欲窮千里目 천리 끝 다 보고파更上一層樓 다시금 누대 한층 더 오르네 오언절구(五言絶句)다. 《당시삼백수(唐詩三百首)》를 필두로 하는 각종 당시선집唐詩選集에 빠지지 않는 절창이다. 관작루(鸛鵲樓)는 '鸛雀樓'라고도 쓴다. ‘鸛雀’ 혹은 ‘鸛鵲’이란 황새를 말한다. 긴 목과 붉은 부리, 흰 몸과 검은 꼬리 깃이 있다. 일명 부부(負釜), 혹은 흑고(黑尻), 혹은 배조(背竈), 혹은 조군(皁君)이라고도 한다. 관작루란 누각 이름으로, 산서山西의 포주부(浦州府. 지금의 영제현永濟縣) 서남쪽에 있었으니 그 위에 관작이 서식했으므로 이런 이름을 얻었다. 황하가 범.. 2018.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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