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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2416

AI로 증폭한 ‘요화妖花’ 배정자 친일파 연구자로 유명한 정운현 형이 마침 근자 여러 남자를 전전한 배정자라는 여인 이야기를 정리한 글을 올렸으므로 심심해서 요새 재미 붙인 AI 사진 증폭 기술을 이용해 과연 저 여성이 어떤 면모를 지녔기에 그리 식민지시대 어간에 그리 유명세를 구가했는가를 구명해 보고자 했다. 앞 사진이 그런 대로 젊은 시절 한창 주가 날리던 시절이라 해서 제공하는데 이걸 증폭해 봤다. 이렇게 복원한다. 좀 더 좋은 어플을 돌리면 더 좋은 성과를 얻을 듯한데 이 정도로 만족한다. 다시 얼굴 누끼만 따보기로 했다. 아래와 같다. 전형적인 馬像, 말상이다. 저 시대에 쌍꺼풀 수술은 없었을 테니 자연산이라 보거니와 쌍꺼풀이 뚜렷하고 눈알맹이가 큰 편이다. 저 여인을 흔히 요부라 하고, 한국의 마타하리라 하는데, 그건 평자들 .. 2024. 3. 2.
[1차 고려거란전쟁] (5) 담대한 서희, 요동을 정벌하려 했다 세 치 혀로 국가를 누란의 위기에서 구한 서희는 이미 앞서 봤듯이 곧바로 소손녕과의 밀약에 따라 여진 몰아내기에 나섰다. 그 자신 문관이지만 사령관이 되어 군대를 이끌고 먼저 청천강과 압록강 사이 두 강 구간 개척에 나서 여진을 공략했다. 고려로서는 다행인 점이 당시 여진은 거란에 복속한 상태로 아직 중앙집권화한 권력이 출현하기 전이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부족별로 할거한 상태라, 응집력이 크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 자신들이 주인으로 섬기는 거란에서 그 개척을 나몰라라 한 까닭에 저항은 크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몇년 사이에 순식간에 8개 성을 쌓으면서 그것을 기반으로 삼아 사민까지 해서 둔전을 기반으로 확실히 이곳은 우리 땅이라는 발판을 만들어 나갔다. 그런 점에서 서희는 최윤덕과 김종서의 직접 선.. 2024. 3. 1.
[1차 고려거란전쟁] (4) 버선발로 뛰어나가 서희를 맞은 성종 일단 한 번 붙어나 보고 강화를 하건 땅뙈기를 떼어주건 하자는 서희의 제안에 순식간에 조정 여론이 바뀌었으니, 민관어사民官御事를 지낸 이지백李知白 또한 서희에 합류해 같은 의견을 제시했다. 다만 시간이 좀 걸린 까닭에 이몽전이 돌아갔으니 뭔가 고려 측 움직임을 보고 다음 타켓을 정하고자 한 소손녕은 더는 참을 수 없어 안융진安戎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중랑장中郞將인 대도수大道秀와 낭장郞將인 유방庾方을 앞세운 고려군이 거란을 격퇴한 것이다. 중랑장 대도수는 대씨라는 성으로 보아 볼짝없이 발해에서 넘어온 사람이다. 이리 되자 외려 겁을 먹은 쪽은 소손녕이었다. 고려 땅에 들어와 처음으로 공략한 안융진에서 패했으니,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때 마침 고려 쪽에서 반응.. 2024. 3. 1.
[1차 고려거란전쟁] (3) 거란의 고려 공포증을 간파한 서희 소손녕을 만난 이몽전이 귀환할 때 성종은 서경에 머문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그 회견 내용을 두고 어떤 이가 말하기를 “어가御駕는 개경開京의 궁궐로 돌아가고, 중신重臣으로 하여금 군사들을 거느리고 가서 항복을 청하게 하십시오.”라는 의견이 나온 데서 엿볼 수 있다. 아무튼 저런 안을 비롯해 어떤 방식으로 거란을 달래느냐 하는 중차대한 문제를 두고 조정 의견은 갈라졌다. 개중에서도 “서경 이북 땅을 나누어서 저들에게 주고, 황주黃州에서부터 절령岊嶺까지 잇는 선을 국경으로 삼음이 옳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한데 중론은 결국 저 땅뙈기를 떼어주자는 쪽으로 결정되고 말았다. 이는 그만큼 고려로서는 급박했다는 뜻인 동시에 애초 거란 침입을 개무시하면서 그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하지 못한 혹독한 대가였다. 일단.. 2024. 3. 1.
[1차 고려거란전쟁] (2) 거란의 요구를 파악한 서희 뒤늦은 대처에 급조한 군사로 거란을 방어하고자 한 고려 조정이 얼마나 허둥지둥댔을지는 안봐도 비디오라, 그래도 일단 한 번 막는 시늉이라도 해 봐야겠고 해서 고려는 역시나 문관 중심 사령부를 구성하니 시중侍中 박양유朴良柔가 총사령관인 상군사上軍使가 되고 내사시랑內史侍郞 서희徐煕는 넘버투인 중군사中軍使, 문하시랑門下侍郞 최량崔亮은 하군사下軍使가 되어 북계北界에 진을 치고서는 거란을 방어하는 시늉을 한다. 이때 고려 성종은 서경西京에 행차 중이었으니, 전방을 독려하기 위함이었는지 아니면 연례 행사라서 그랬는지 알 수는 없지만, 기왕 나간 김에 안북부安北府까지 가서 전방을 시찰하려 한다. 이 무렵 소손녕蕭遜寧은 이미 봉산군蓬山郡을 공격하여 선봉군사先鋒軍使인 급사중給事中 윤서안尹庶顏을 포로로 잡아갔다. 이에 이.. 2024. 3. 1.
[1차 고려거란전쟁] (1) 뻘짓한 고려 편의상 고려거란전쟁을 세 차례 있었다 하지만, 누누이 말했듯이 그것 말고도 두 왕조 사이에는 크고 작은 전쟁이 끝임없이 벌어졌다. 치열한 탐색전이 펼쳐지는 가운데 그 서막을 연 것이 널리 알려졌듯이 993년, 고려 성종 12년, 요遼 통화統和 11년에 펼쳐진 제1차 전쟁이라 이 전쟁이 실은 두 왕조에 모두 가장 이상적인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거란 부마 소손녕蕭遜寧이 자칭 80만을 이끌고 국경을 넘었다 했지만 이는 개뻥이며, 실제 동원한 군사는 절반도 안 된다. 쪽수가 많다 해서 겁박했을 뿐이다. 다행해 이 전쟁이 이렇다 할 충돌없이 외교협상으로 끝나서 그렇지망정이지 하마터면 고려 국토가 초토화할 뻔 했다. 우리는 이 조우에서 세 치 혀 서희에 의한 이른바 강동육주 획득을 한국 역사상 가장 빛나는 외교협.. 2024.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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