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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2416

[마질차] (3) 청상과부 싱글맘이 된 김춘추의 딸 앞서 우리는 신라 제38대 원성왕元聖王 김경신金敬信(재위 785~798) 선대 계보를 추적하면서 그 5대조가 마질차摩叱次 혹은 마차摩次임을 보면서, 그런 마질차가 조선시대에 발간된 경주김씨계 족보에서는 655년, 신라 태종무열왕 2년 조천성助川城 전투에 낭당대감郎幢大監으로 출전해 백제군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김흠운金欽運의 아들로 등장함을 보았다. 조선시대 족보는 그 역사성을 의심하는 시각이 적지 않거니와, 무엇보다 그에서 보이는 계보들이 추리면 첫째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토대로 삼아 후대에 만든 듯하거나 그에서는 보이지 않는 대목들이 보이는 까닭이라, 간단히 말해 선대 기록을 토대로 억지로 그런 계보를 만들어냈다는 생각이 아주 강하게 작동하는 까닭이다. 하지만 경주김씨와 그 분파에서 나타는 신라시대 .. 2024. 3. 7.
민둥산과 사투를 벌이는 조선총독부 2. 임업 개설 조선에서 삼림·산야는 총면적이 1,600만여 정보로, 전 토지의 7할 이상을 점하고 있다. 또 반도의 기후는 남북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북쪽의 한대에서 남쪽의 온대에 이르기까지 각종 수목이 자란다. [97] 따라서 삼림·수목의 종류가 풍부하여 그 수가 700종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예로부터 임정林政이 갖추어지지 못해, 임야의 사점私點56)을 금하였다. 이에 특수 보호림인 봉산封山·금산禁山 등을 제외하고는 무주공산無主公山이라 하여 인민들 의 자유 채초採樵57)를 방치하며 보살피지 않았기 때문에, 인민은 제멋대로 남벌濫伐하 거나 화전火田을 함부로 경작하고 조금도 식재植栽 보호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리고 조선 말기에는 보호림 제도도 폐지되어 임야의 대부분이 극도로 황폐해졌고, 예전 .. 2024. 3. 7.
집단반발에 한 발 물러난 총독부, 묘지규칙 개정 개설 새로운 당국자가 새로운 시정을 통해 얼마나 민정民情에 적절하게 시세의 정곡을 파 고드는 데 힘썼는가는 앞서 살펴본 관제 관련 외에 민의 창달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가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아래에 두세 가지 사항을 싣기로 한다. 1. ‘묘지규칙’의 개정 예로부터 조선의 존족尊族 분묘 존중 사상은 그 뿌리가 자못 깊다. 전통적으로 내려 온 선조를 숭배하는 관념과 [322] 유학에서 전래된 웃어른을 존경하는 관습과 풍수지리설의 관념 세 가지가 결합해, 분묘의 위치와 형상은 현세에서 인륜의 표준이자 미래의 가문의 번영을 지배한다고 여겨 온 것이다. 이로 인해 분묘지를 선정하는 데에 최대의 노력을 기울이고 몰래 묻거나暗葬 무덤을 훔치는偸塚 일이 성행해, 국토가 황폐해지고 소송이 끊이지 않았으며 공공의 .. 2024. 3. 6.
원성왕 5대조 잡간匝干 마질차摩叱次는 누구? 신라 원성왕 김경신의 5대조로서 생전 최고 관위가 잡간임을 확인할 뿐, 그 외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 2 원성대왕元聖大王에 다음과 같이 일렀다. 왕의 능은 토함산吐含山 서쪽 골짜기 곡사鵠寺(지금의 숭복사崇福寺)에 있는데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비문이 있다. 왕은 또 보은사報恩寺와 망덕루望德樓를 세웠고, 조부 훈입訓入 잡간匝干을 추봉追封하여 흥평대왕興平大王이라 하고, 증조 의관議官 잡간을 신영대왕神英大王이라 하고, 고조 법선法宣 대아간大阿干을 현성대왕玄聖大王이라 했다. 현성대왕의 아버지는 곧 마질차摩叱次 잡간이다. 이것이 삼국유사가 말하는 원성왕 계보인데, 아쉽게도 마질차가 누구이며, 그런 마질차는 또 선조가 누구인지 알 수는 없다. 이런 내용이 삼국사기에는 조금 다르게 보인다. 즉 이.. 2024. 3. 6.
깐족대다 6년간이나 고려에서 억류생활한 거란 사신 지랄리只剌里 앞서 고려거란전쟁 와중에 하공진이라는 고려 충신이 있었음을 보았거니와, 그와 비슷하게 상대 진영 고려에 전권특사로 갔다가 6년간이나 억류생활을 한 거란 조정 신하도 있다. 이 일은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와 같은 고려 측 기록과 거란측 증언인 요사遼史에 모두 남아있지만, 문제는 단순히 표기가 다른 데서 한 발 더 나아가 그 정체도 다른 듯한 느낌을 준다. 이를 위해 위선 고려 측 기록을 본다. 그에 의하면 1013년, 그러니깐 거란에서는 성종 야율륭서 개태開泰 2년, 고려로서는 현종 4년 3월 17일에 거란에서 사신 으로 좌감문위 대장군左監門衛大將軍 야율행평耶律行平이라는 이가 와서 흥화興化를 비롯한 6개 성을 빼앗은 일을 질책하더니, 같은 야율행평이 석달 뒤인 같은 해 1013년 7월 18일에 다시 고려에 나.. 2024. 3. 6.
노인과 어린이들을 총알받이로 내세운 거란 드라마 고려거란전쟁 흥화진 전투 한 장면이었다고 기억하는데, 양규가 고군분투하는 흥화진 공략을 위해 거란군이 포로로 잡은 고려 노인과 어린아이들을 앞세우고서는 성벽을 기어오르게 하는 장면이 있었으니, 이를 두고선 작가 상상력 운위하겠지만 놀랍게도 이것이 실은 거란 실제 전투 전법 중 하나였다. 요사遼史 중 병위지兵衛志는 글자 그대로 거란의 군사조직과 그 운용방식을 정리한 대목이라, 개중 권34 지志 제4 병위지 상兵衛志上을 보면 그네가 전쟁을 하는 방식이 잘 소개되어 있는데 개중 한 대목이 이렇다. 그(거란) 타초곡 집안 병사들[打草穀家丁]이 의갑衣甲을 갖추고 병기를 들고서 둥글에 부대를 이루는데 모름지기 먼저 윈림園林을 베고난 뒤에 노인과 어린이들을 잡아다가 흙과 나무를 달라서는 호참壕塹(해자)를 메우.. 2024.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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