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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2287

부여논산가도가 절단낸 부여나성 부여와 논산을 연결하는 도로는 식민지시대 개설되었다. 이 부여논산가도는 백제사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 결정타였거니와 이 도로 개설을 즈음해 비로소 부여 나성이 속살을 드러냈다. 나아가 가도가 지나는 근처를 따라 백제고분이 밀집한다는 사실도 비로소 드러났으니, 능산리 고분군이 문화재로 재발견된 것으로 이때였고, 그 인근 다른 고분군들도 이때서야 존재를 드러냈다. 언제 짬이 나면 이 가도의 역사 자체를 정리하픈 생각도 굴뚝처럼 솟아난다. 하지만 지난 1년, 하도 능산리에 질린 까닭에 당분간은 숨고르기가 필요할 듯하다. 첨부 유리건판 사진은 틀림없이 그 가도가 통과하면서 절개한 나성 동문, 능산리사지 인접 지점인 듯한데, 자신은 없다. (2017. 6. 8) 2023. 6. 8.
엄동설한 야간에 후레시 켜고 발굴한 백제금동향로 널리 알려진 능산리 사지 이른바 추정 공방지 백제금동향로 출토 장면이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노출 등을 조정해 보니 야간 발굴이었음이 더욱 명백해진다. 후래시를 썼던 것이다. 졸저에 정리했듯이 지금 세종문화재연구원 실장으로 있는 진성섭선생과 지금 서라벌문화재연구원 조사연구단장 차순철 선생이 맨손으로 엄동설한에 야간에 팠다. 저 사진은 진 선생이 찍었다. 발굴 직후엔 금박이 비교적 완연했으나 부여박물관으로 옮긴 직후 뜨거운 물을 퍼부어 씻을 적에 금박이 많이 흘려내렸다는 후문도 있다. 적지 않은 문제를 노출한 엄동설한 야간발굴이었다. 2023. 6. 8.
유리건판이 품은 1920년 능산리 사지 부여 나성과 능산리 고분군 사이 계곡에 위치한 능산리 사지寺址는 1991년 이후 비로소 발굴조사가 이뤄져 금동대향로와 창왕명 석조사리감이 대표하는 사비백제사를 대표하는 유적으로 우뚝 섰다. 당시 시굴조사를 윤무병 선생이 했는데, 이전에는 논밭이었다. 이런 사정은 식민지시대라 해서 다를 바 없었으니, 첨부 사진이 바로 그것을 말해 준다. 이 유리건판 사진은 1920년 조선총독부에서 촬영한 것이라 하는데, 사지를 찍으려 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성 동문을 담기 위한 구도로 포착되었다. 지금의 사지가 어딘지는 단박에 알리라. 계단식 논이 조성된 저곳이 바로 그곳이다. 저 아래 향로와 석조 사리감이 잠자고 있었다. (2017. 6. 8) 2023. 6. 8.
[UNKNOWN EGYPT OFF THE BEATEN PATH] 소하그와 메리트아문 거상 by 유성환 일전에 유재원 선생님께서 소하그Sohag에 서 있는 람세스 2세 딸의 입상이 이집트에서 보신 여인상 중 가장 아름다웠다고 말씀하시면서 그 딸의 이름이 무엇인지 물어보신 적이 있습니다. 현대의 이집트학자들에게는 매우 당혹스럽게도 고대 이집트의 왕실에는 근친혼이 일상이었으며 유명한 파라오들은 자신의 딸과도 혼인관계를 맺었습니다. 신왕국시대 제19 왕조 람세스 2세(Ramesses II: 기원전 1279-1213년) 치세에 공주에서 대왕비가 된 인물은 빈트아나트 1세(Bintanath I)·메리트아문(Meritamun)·네베트타위(Nebettawy), 이렇게 최소 3명입니다. 이들 중 소하그의 람세스 2세 신전에 서 있는 인물상 주인은 바로 메리트아문입니다. 그렇다면 소하그는 어디일까요? 아마도 페친 여러분들.. 2023. 6. 7.
노필盧弼과 [삼국지집해] by 김영문 *** 이하는 삼국지 배송지 주 완역을 앞둔 김영문 선생 페이스북 글이다 *** * 노필은 중국 근현대 시기 정사 [삼국지] 고증과 연구에 막대한 공적을 남긴 유명한 장서가 겸 고증학자다. 그는 1876년 중국 후베이성(湖北省) 셴타오(仙桃)에서 태어나 1967년 텐진(天津)에서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후베이의 유명한 서원인 경심서원(經心書院)과 양호서원(兩湖書院)에서 공부하고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전공했다. 한 때 중화민국 정부 국무원 비서로 재직하며 정치에 발을 담그기도 했으나, 평생 고서를 모으고 고증하는 훈고 작업에 전념했다. * 노필의 스승 양수경(楊守敬)은 청말 민초 시기에 금석, 서예, 여지, 화폐, 장서 등 부문에서 83종의 저서를 남긴 대학자다. 양수경의 대표저서.. 2023. 6. 4.
파라오 람세스2세가 자기 신민臣民을 갈굴 때 by 유성환 기원전 1274년 5월 12일 발발한 카데쉬 전투(Battle of Kadesh)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는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많은 분께서 주지하시는 것처럼, 이 전투는 서아시아 최강국 이집트와 히타이트가 카데쉬라는 도시를 두고 격돌한 인류 역사 상 최초의 대규모 전면전이었습니다. 또한 당시 이집트 군을 지휘한 람세스2세(Ramesses II: 기원전 1279-1213년)가 히타이트 총사령관 무와탈리 2세(Muwatalli II: 기원전 1295-1272년)의 기만전술에 넘어가 주력부대로부터 고립되면서 상당히 고군분투했다는 것 역시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전략적 오판 때문에 적병들에게 살해당할 – 혹은 그보다 더 일이 꼬여 포로로 사로잡힐 – 뻔한 상황을 가까스로 모면한.. 2023.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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