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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2416

대한제국 황제의 예복 고종황제와 황태자가 양관 앞에서 촬영한 이 사진이 대한제국기 대원수 예복으로 생각되는 옷이고 이때 착용한 모자가 피켈하우베입니다. 화질이 좋은 사진으로 보면 소매에 人자형 장식 줄에 대원수 11줄, 원수 10줄로 보입니다. 그러다가 을사늑약 이후 원수부가 해체되고 1905년에 바로 이 예복을 안입었는지는 확인이 아직 안되었고 1907년이 되면 확실히 원수부의 예복 형태가 아닌 육군 대장복을 입은 순종의 사진이 등장합니다. 순종의 사진에서 보면 모자 윗면이 편평한 형태이고 상의에 人자 장식이 9줄로, 대원수가 아닌 육군대장복입니다. 그러니까 요지는 순종은 황제로서 피켈하우베를 못 착용한 겁니다. 그런데도 순종의 즉위기념장, 바로 앞의 즉위기념우표, 기념엽서, 또 우체국 소인등에서 대원수의 모자를 중요한 모.. 2021. 2. 3.
김재원은 왜 천마총 황남대총 발굴을 반대했던가? (2) 정부의 심장을 겨눈 전임 국립박물관장 중앙일보 1974. 11. 18 | 종합 4면 기고문 중 한 대목이다. 지금 우리의 손으로 저 고분을 파헤쳐서 그 안에서 보물이 나왔다고 신문이 떠들고 독자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킴으로써 우리가 얻는 바가 과연 무엇일까. 경주의 고분은 학자들에게는 벌써 그렇게 학적 흥미를 느끼지 않게 된지 오래다. 왜? 경주 고분의 구조와 부장품은 이미 국내외에 잘 알려진 까닭이다. 일제 때인 1920년대에 우연히도 발견된 금관총은 그 규모나 부장품으로 보아서 제1급의 고분이었다. 그러나 그 고분이 발견될 때까지는 분의 형태가 완전히 파괴되어 그야말로 조그마한 잔해만이 지상에 남아있어 과연 고분인지조차 모를 정도였다. 그런데 도로확장공사 중에 그 부장품이 드러남으로써 관계사들이 당황하여 사후처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2021. 2. 2.
천마총 황남대총 발굴은 이맹희 아이디어였다 현재 보문단지를 그때 만든 다음 그후 조금씩 건물을 더 지어서 지금처럼 조성한 것이다. 원래 정부의 제안은 보문단지 호숫가에 도로를 만들고 건물을 전부 산쪽으로 붙여서 짓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할 경우 호텔 등에서 호숫가로 가려면 찻길을 건너야 할 뿐더러 결국 호수와 멀리 떨어진 건물 일대의 땅은 쓸모가 없어진다. 이때는 내가 고집을 피워서 결국 지금대로 호숫가에 건물을 짓고 길을 건물 밖으로 내도록 했다. 호수를 다 파고 나서는 또다른 문제가 생겼다. 그 호수가 단순한(이상 238쪽) 위락용 호수가 아니라 농업 용수를 제공하는 호수이다 보니 정작 봄, 여름철이 되면 농사 짓는데 쓰느라 물이 다 빠져나가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 위에 다시 하나의 댐을 더 만들어서 물을 저수하기로 했.. 2021. 1. 31.
유신정권의 관광산업육성과 호텔 신라, 그리고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 원래 서비스업에는 아버지나 나나 별로 내키지 않았는데 관광산업을 위해 정부에서 큰 기업들은 다 호텔을 하나씩 지으라고 해서 우리는 당시 영빈관이 있던 장충동 일대를 매입해서 호텔을 세우기로 했다. 그 호텔은 가능하면 삼성에서 하지 않으려고 고의적으로 공사를 늦추다가 '78년 임페리얼에서 신라로 이름을 바꾼 후 완공되었다....요즘도 나는 경주에 가끔 가보는데 그 역시 당시 박대통령의 지시로 개발된 것이다. 물론 지금의 경주는 발굴 전의 모습보다는 훨씬(이상 236쪽) 더 훌륭하다. 그러나 그 역시 민간인들에게 처음부터 다 맡겼더라면 더 좋은 상태로 변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지금도 경주 불국사 일주문 입구의 건립비에는 '박대통령의 높은 뜻'과 더불어 당시 경주 개발에 참가한 기업과 대표자의 이.. 2021. 1. 31.
《한경지략漢京識畧》, 유득공-유본예 부자의 연결고리 인연이란 게 묘해서 얼마전엔 유득공柳得恭(1748~1807) 《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가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완역 출간되어 며칠만에 독파했거니와 그에서 군데군데 저 《한경지략漢京識畧》이 언급되어 가만 생각하니 저 역주본 역시 얼마 전에 도서출판 민속원에서 서울역사박물관 박현욱 부장 손을 거쳐 역주본이 출간되었으니 난중에 시간 날 적에 훑어 보리라 젖혀 두었던 것인데 기왕 이리된 거 내친 김에 이것도 보리라 해서 마침내 꺼내들고는 이리 뒹굴 저리 뒹굴하며 살폈으니 뭐 이런 지리지 보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겠는가? 앉은 자리에서 그냥 훑으면 한두 시간이면 족하다. 저에서 무슨 거창한 내용을 뽑고 싶거덜랑 그런 자리는 찾아서 살피면 될 일이다. 둘을 이어주는 고리는 저 《한경지략》 저자 유본예柳本藝(1777∼18.. 2021. 1. 30.
군대 가기 싫어 일본으로 밀항한 이맹희 이맹희..이병철 장남, 이건희 큰형. 1931년생 6.25 발발 때 스무살...징집대상 이를 피해 그는 일본으로 밀항했다고 자서전에서 썼다. 밀항의 역사..이것도 누군가는 정리해야 한다. 이 무렵에 대규모 밀항이 이뤄지게 되거니와 내가 아는 문화계 저명인사 중에도 제법 있다. *** 특히 경상도 지역 인사들이 대규모로 밀항을 감행한다. 그 이유 중에 가장 큰 것이 군대였다. 화가 이우환이 대표적이다. 그 역시 징집을 피해 서울대에 다니다가 도망쳤다. 자서전을 이런 식으로 읽으면 그 자체 그 시대의 박물관임을 엿볼 수 있다. 경상도 지역 인사들이 많은 이유는 뭐니뭐니 해도 일본과의 지리적 인접성이었다. 밀항을 위해서는 교통로가 필연적으로 전제되어야 하는데 이 교통로는 제국주의 식민지가 가져다 준 축복이었다.. 2021.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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