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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2296

거란-송을 갖고 노는 고려와 서하 거란 요나라 역사 통사로 원나라에서 관찬한 요사遼史는 전체 108권이라, 개중 열전은 권63부터라, 딱 절반이 열전이다. 그 열전 마지막이자 요사 전체의 마지막인 권108 열전 제46은 거란어에 대한 해설인 국어해國語解이고, 그 바로 앞이 이국외기二國外記라, 이는 여타 사서에서는 외국열전을 세운 데 견준 것과 대비하는데, 요사가 말하는 이국二國이란 바로 고려高麗와 서하西夏라, 이는 그만큼 거란 역사에서 두 나라가 차지하는 비중이 막강한 까닭이다. 이 두 왕조가 거란을 다룬 양상을 보면 아주 비슷해서 당시 동아시아 국제정세를 실로 절묘하게 갖고 놀았다는 표현이 딱 적당하다. 이 이국열전에는 고려의 경우 그런 양상이 잘 드러나지 않고 주로 두 왕조 사이에 있는 전쟁과 평화 시대 이야기를 추렸지만, 이는 고려.. 2024. 1. 7.
장례식 조문객과 사찰 낙성 축하객 (1) 빈소와 조문객 고관대작을 지내거나 다른 분야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사람의 죽음에 이르러 항용 보이는 표현 중 하나가 임금이 부의를 후하게 해서 장례를 치르게 했다는 말이거니와, 이런 점들이 왜 고고학도들한테는 심각하게 보이지 않는지 나로서는 신통방통할 뿐이다. 조선시대는 기본이 이른바 박장薄藏이라, 일부러 값나가는 물건을 무덤에 넣는 일을 피한 전통이 오래되는 바람에 이걸 잊어버렸는지 모르지만, 나아가 시대별 문화권별로 넒나듦이 있지만, 근간은 후장厚藏이라, 값나가는 물건을 될수록 많이 넣음으로써 부와 권력을 과시하곤 했으니 해당 무덤에 들어가는 껴묻거리 상당수가 이른바 부의賻儀였다는 사실을 하시라도 잊으면 안 된다. 이 부의를 가능케 하는 절대 근거가 빈殯이라, 빈은 간단히 말하자면 조문을 받는 기간이다. 동아시아.. 2024. 1. 7.
무덤 벽화로 보는 거란 한 장면 어느 무덤인지 특정하지는 못하나 거란 벽화 한 장면이다. 남자들 머리는 다 대머리 독수리머리로 만들었으니, 고려거란전쟁에서 소배압을 필두로 하는 거란 군인들을 저리 처리한 것은 나름 고증에 철저한 면을 보여준다. 인종이 어디에 속하는지 모르겠지만 모조리 매부리코다. 세발 솥으로 죽을 끓여서 먹는 장면인 듯하다. 국자 숟가락 젓가락이 다 보이는데 문제는 젓가락으로 집을 만한 반찬은 그림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엎은 사발을 나르는 남자가 보인다. 개죽통 같은 걸로 국자로 무얼 먹으려는지 하는 남자도 있다. 틀림없이 죽을 해 먹었는데 곡식은 잡곡일 것이다. 잡곡을 죽으로!!! 저들이 양을 많이 키운다고 양고기 주식으로 먹었을 것이다? 위험한 발상이다. 2024. 1. 7.
세키노 다다시關野貞가 말하는 1915년 능산리 고분 발굴 ***세심한 번역이 아니며, 눈에 보이는 대로 옮긴 것이니 상세한 인용은 직접 고고학잡지 1916년 6-3호를 보라. 나는 지난 메이지 42년(1909) 한국 탁지부 촉탁을 받아 다이이谷井 문학사 구리아마栗山 공학사와 더불어 백제 고도인 공주와 부여의 유적을 조사한 일이 있지만 본년 7월 곡정 문학사 및 후지타後藤 공학사와 조선총독부 촉탁을 받아 다시 부여에 이르러 그 부분을 답사하고 6일 두 사람과 갈라져 공주에 이르러 그 산성 연구를 시도했다. 앞선 조사에서는 성벽 유적의 외곽 형태 외에 백제시대 유물을 발견할 수 없었지만 이번에는 처음으로 분묘 발굴을 시도한 결과 당시 분묘 양식도 분명히 알게 되고 또 부장품이나 성벽 유적 출토 고기와의 문양이 크게 우리 나라시대의 그것과 친밀한 관계가 있음을 알게.. 2024. 1. 7.
독자 제로인 글을 논문이라 발표하는 개떡 같은 세상 직업적 학문 업계서 매양 나오는 불만 중 하나가 그런 이야기는 내가 이미 발표했는데 그것도 읽지 않아느냐는 것이니 또 하나 설혹 그것을 참고했다 인용문헌 참고문헌에 밝혀놨다 해서 모름지기 그가 내 논문을 읽었다는 증거는 되지 못하니 그 인용맥락을 보면 거의 백퍼 내 주장을 오도하거나 정작 중요한 지점은 쏙 빼버리고 엉뚱한 데를 강조 오도한 일을 부지기로 본다. 이건 내 경험이기도 하고 여타 주변 사람들도 거개 반응이 같다. 더 어처구니 없는 일은 정작 내 글을 인용하기는 했는데 엉뚱한 데다 인용처를 밝혀주면서 정작 내가 주장한 건 아무런 인용도 없이 지가 주장한 것처럼 처리한 일이니 이는 실수가 아니라 고의다. 더더욱 어처구니 없는 일은 나중엔 그 놈 글을 인용하면서 내 글은 쏙 빼어버린 경우다. 이런 .. 2024. 1. 6.
[선화공주의 비밀을 파헤친다] (1) 신라 공주를 취한 마를 캐는 백제 아이 이 선화공주 건은 여러 번 산발로 다룬 적이 있지만 이참에 제대로 정리해 보고 싶어 다시 붓을 댄다. 이 문제는 지금 우리 앞에 있는 화랑세기가 김대문의 그것을 필사한 소위 진본인가? 아니면 그 필사자인 남당 박창화라는 사람이 꾸며낸 역사소설인가를 판별하는 데도 가늠자가 된다. 백제 무왕武王은 삼국사기 그의 본기에 의하면 본명이 장璋이니, 법왕法王의 아들이다. 서기 600년, 부왕이 죽자 왕위에 올라 재위 42년째인 641 봄 3월에 훙薨했다. 그의 본기에서는 시호를 무武라고 하고는 사신을 당에 보내어 표문을 올리기를 “임금의 외신外臣인 부여장扶餘璋이 졸卒했습니다”고 아뢰니, 황제가 현무문玄武門에서 애도식을 거행하고 조서를 보내어 다음과 같이 위로했다고 한다. “먼 나라를 위로하는 방도는 총애로운 책명보.. 2024.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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