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역사문화 이모저모2296

왜 혁명은 주변부에서 주도하는 위만과 온조를 보면 안다 사회 변혁의 주체 혹은 동기로서 혁명은 언제나 주변부에서 일어난다. 왜 그런가는 중심부를 차지한 주류는 본능 혹은 생득으로 기존 체제를 옹호하며 그것을 지키고자 하는 까닭이지 무슨 개뼉다귀 같은 이유가 필요하겠는가? 이는 중심부로 치고 들어가고자 하는 지역의 욕망을 부채질하는데, 언제까지 이들이 시다바리 총알받이로 만족할 수는 없는 까닭이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모조리 혁명, 그 완성으로서의 새로운 왕조는 주변부 차지였다. 중국 상주商周 이래 처음으로 중국대륙을 대략 700년 만에 통일한 왕조는 서북쪽 변방 진秦이라는 촌놈들이었고, 그를 이어 새로운 권력으로 출현한 유방은 산동성 촌놈이었다. 수당을 건국한 주체 역시 북쪽 周 계통 유목민 후손들이었다. 다 그렇다. 신라? 어디서 굴러먹다온 개뼉다귀 같은 .. 2024. 1. 3.
공터를 찾아 도성을 만든 중국 일본이랑 한반도는 다르다 조선왕조가 출범하고서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가 새로운 도읍 건설이라, 이를 찾아 신왕조가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는 비교적 잘 알려졌거니와 한때는 계룡산 기슭도 검토되었다는 사실 역시 잘 안다. 그 절대 조건으로 풍수를 들지만 이는 실상 개소리라, 풍수가 맞다 해도 문제는 거기에 도시가 들어서 있으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이 점이 역사학이나 고고학에서는 자주 망각되는 게 아닌가 하는데, 신도시 건설 제1 조건은 공터다. 이 공터는 또 제반 조건이 있으니, 무엇보다 강이 흘러야 하지만 이 강은 이율배반이라, 그러면서도 홍수 침패 우려가 적거나 없어야 한다. 그렇게 고심한 한양만 해도 잦은 청계천 범람으로 얼마나 고생했는지는 그것을 준설한 영조의 회고를 보면 안다. 지금의 경복궁 창덕궁 일대? 간단하다... 2024. 1. 3.
바둑판식 도시구획은 신도시에서만 가능하다 이 바둑판식 도시계획 혹은 구조를 동아시아에서는 조방제條坊制 같은 말로 표현하곤 하는데, 이 말은 바둑판식으로 땅을 구획 개간한 다음, 일정한 구간씩 칸막이를 쳐서 토지를 분할한 경우를 말한다. 이런 도시구조 한국사를 보건대 고구려 장안성, 백제 사비도성, 조선왕조 한양도성 정도가 가능하며 근현대에 와서는 공업도시로 인위로 조성된 창원이 대표적이다. 나아가 요새 툭하면 만드는 세종을 비롯한 신도시 역시 그런 맥락에서 조방제를 구현하거나 그 현대적 발현이라 보아 대과가 없다. 신라의 경우 조방제 흔적을 찾으려는 시도가 고고학계를 중심으로 집요하기만 한데, 그 엇비슷한 흔적이 황룡사지라든가 하는 데서 찔끔찔끔 걸리기는 하지만, 경주라는 도시 자체는 전형하는 조방제가 도대체가 나타날 수가 없는 역사성이 있다... 2024. 1. 3.
어보御寶와 어책御冊, 그 아슬아슬한 관계 "어책御冊은 어보御寶에 대한 주석(annotation)이다" 얼마전 감수라는 되먹지 않은 이름으로 어보 관련 평가서에다가 내가 함부로 썼다가, 이건 아무래도 생각을 다시 해봐야겠다 해서 빼버렸으면 좋겠다고 한 말이다. 한데 이 말 맞는 거 같아. 명언 같아. (2016. 1. 3) *** 내 말 틀린 거 봤어? 맞어. 어보와 어책 이 둘 관계를 제대로 의심해본 사람이 없다. 어보가 추상이라면 어책은 그 추상을 해체한 구상이다. 그것을 풀어쓴 것이 바로 어책이다. 어보건 어책이건 신주神柱와 더불어 신위神位를 구성하는 삼두마차다. 실제 종묘 각 신실神室은 이 셋을 모름지기 세트로 안치 봉안해서 모신다. 2024. 1. 3.
중앙이 와해하자 시詩가 전성을 구가했다, 당시唐詩의 경우 우리가 아는 당시唐詩, 그것이 극성을 구가한 때가 정확히 절도사 시대의 개막, 혹은 그 본격적인 전개와 궤를 같이한다. 중앙이 파열음을 내지 않았으면, 절도사가 없었으면 이백도 없고, 두보도 없으며 한유도 없고 유종원도, 백거이도, 원진도 없었다. 중앙이 해체되어야 하는 이유다. (2016. 1. 3) *** 우리가 아는 당시唐詩란 정확히는 이백 두보의 시대 이후를 말한다. 이두만 해도 그들 자신은 불행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 위대한 문학의 자양분은 안사의 난이었다. 이 난리통이 없었으면 이두는 없다. 문학은 고통이 배양한다. *** 절도사들이 구축하는 번진의 시대를 어찌 봐야 하는가? 절도사들이 구축하는 번진의 시대를 어찌 봐야 하는가?우리가 배운 역사에서 이상형은 언제나 철저한 중앙집권이었다. 이기백이.. 2024. 1. 3.
돌궐 와해가 불러온 춘추전국시대 북방의 패자 돌궐이 와해하자 당 왕조는 만세를 불렀다. 하지만 그 기쁨은 너무나 찰나였다. 돌궐이 물러난 자리에 회흘이 들어섰다. 서남쪽에서는 토번과 토욕혼이 비대해졌다. 안사의 난에 진압군으로 참전한 회흘은 그 대가를 요구했다. 황제의 딸을 데려가고, 비루한 말들을 고가로 사달라고 요구했으며 장안을 방문한 회흘 사신은 위수지역을 벗어나 장안 거리를 활보하며 깽판을 치고 사람을 죽여도 중국의 황제는 넋 놓고 바라볼 뿐이었다. 토번은 장안을 점령하기도 했다. 짠보가 중국의 황제를 우습게 보는 시대였다. 동아시아 역사를 통괄하면 늘 이러했다. 우리는 중국의 팽창에 박수를 보냈지만, 그 박수는 돌이켜보면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일전에 만난 어느 몽골 친구의 말이 뇌리를 때린다. "몽골 인구가 천만이 되면 중국.. 2024. 1. 3.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