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호적, 족보, 일기 이야기 (역사인구학)616 조국이 없는 노동자, 민족이 없는 노비 막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다음과 같이 갈파했다.."노동자들에게는 조국이 없다" 그렇다면 말이다. 노동자들에게도 없는 조국이노비에게는 있겠는가? 조국도 없는데 무슨 민족주의란 말인가? 그리고 그 조국도 민족도 없는 노비라는 종족이 무려 전국민의 40프로를 넘던 시기가 17세기 조선일진데조선을 어떻게 민족주의로 재단할수 있겠는가? 우리는 "민중"과 "민족"은 거저 얻어진줄 안다. 그런데 18세기 호적만 봐도 그 안에는 민중도 없고 민족도 없었다. 그로부터 200년도 안 된 1919년 독립선언문에는 분명히 "민중"도 있고 "민족"도 있는데 말이다. 이 200년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이것이 궁금하지 않다면 도대체 이 세상에 뭐가 궁금하겠는가? *** [편집자주] *** 노동자한테는 없다는 조국, 저.. 2026. 7. 26. 민중이 없는데 민중을 찬양하다 80년대 이른바 민중사학 세례를 받은 우리나라 역사학은일견 굉장히 민중 주도의,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민중의 사학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왠걸. 이 우리나라 역사를 수놓고 있다는 민중사학은조금만 일차 사료를 읽어 내려가면 도대체 누구를 민중이라고 부른 것인지 모호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호적을 보자. 우리나라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200년간 남아 있는 호적을 보면 그 안에 별의별 사람이 다 있다. 이 수많은 배경의, 수많은 성격의 사람을 통틀어서 양반 빼고는 몽땅 민중이라고 부르는 것이 우리나라 민중 사학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 사학에서 "민중"이라는 것은 일견 명쾌해 보이지만이것은 20세기 중반, 그 중에서도 한국의 경우 1970년대 이후에나 성립하기 시작한 시민사회를 지.. 2026. 7. 26. 이전 시대와는 결별한 대원군 정권의 구조 필자 생각이지만, 조선 말기 정국에서 대원군 정권, 그리고 그 후의 고종 시대의 정권도 이전과 비교하여 상당히 이질적이라는 생각이다. 이런 변화는 아마도 순조 이후 19세기 들어오며 시작되다가 대원군 이후 더 노골화했다고 생각하는데, 이 시점에 중앙정치권에 진입한 사람 중에는전통적인 사족이 아니라, 출신이 의심스러운 이가 상당히 많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쉽게 말해 평민 출신, 중인 출신으로 이전 같으면 중앙 정계 진입이 불가능하던 이들이 적지 않은 숫자가 중앙 정계로 진입을 시작했고, 대원군 정권 이후에는 아에 당상관급까지 들어간 이도 상당수 있으며 그 중에는 예전 같으면 도저히 불가능했을서자 출신도 상당히 많아 보인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조선후기사에서는 하도 소위 말하는 문중 등살이 심한 탓에 개별 .. 2026. 7. 25. 조선 후기 산송이 급증한 이유 우리나라 산송이 늘어난 이유-. 곰곰히 생각해 보면 설명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필자가 보기엔, 우리나라 신분구조가 조선후기 들어오면서 격변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18세기부터 본격화하는 신분제도의 변화는우리나라 묘제에서도 뚜렷하다. 조선시대 전-중기에는 양반들이나 쓰던 회곽묘가 후기 들어오면, 특히 18-19세기가 되면 그 아래로 확산되는 징후가 급증한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첫째로 그 전까지는 인구의 절반에 육박하던 노비가 점점 평민으로 풀려나고, 평민 중에서는 자신이 양반 직역을 받은 "양반 비스무리한 존재"로 되었다는 신분상승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부모 묘를 제대로 쓰려 하게 된다. 우리나라 임란 때까지 노비들은 죽은 후 어떻게 했는가를 보려면 쇄미록을.. 2026. 7. 25. 비로소 생명력을 얻는 필자 머리속 회곽묘 기억 필자는 요즘은 더 이상 하지 않지만, 연구 초창기 상당히 오랜 기간 고고학 지인 분들 도움을 얻어 발굴 현장을 누볐다. 이때 얻은 기억 중에 무엇이 있는가 하면, 이 시대 회곽묘에 대한 발굴 경험이 있는 분들은 누구나 동의하겠지만, 18세기 이후 회곽묘가 이전과 달리 신분적으로 상대적으로 하위의 집단에도 확산하는 경향이 뚜렷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회곽묘 중에는 관 둘레에 회도 충실히 쓰지 못하고 간신히 회곽묘 흉내만 내어 놓은 것도 많아진다. 18세기 이후 회곽묘 상당수가 이렇다. 이 회곽묘는 필자 기억과 경험의 머릿속에서나 그렇게 팩트로만 존재하던 것이었는데근래 호적과 일기를 공부하면서 이 무덤들이 과연 누구들 것이었는지 확인하지 못하고 남아 있던 링크가 하나 채워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조선후기 18.. 2026. 7. 25. 포옹일기 1842년 1월, 조폭을 방불하는 집단 패싸움 산변 사건 (산송 사건)이 있어서 내가 30명을 모아서 청양 납산동의 금장 (산송 때문에 문제가 생긴 구역) 하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옛 금정역의 역한(驛漢) 최한석으로 하여금 수표를 작성하여 이름을 쓰고 서명하게 한 다음 묘를 파가게 하였다. 아침에 청양향교가 있는 마을 앞에 이르니 그 역한이 모집한 백여 명과 고을 종들이 길가에 매복해 있다가 나와서 신분을 막론하고 사람을 때려 결박하고 의관의 주머니 속에 있는 수표를 빼앗았다. 이 일로 인해 어떤 사람은 어깨와 갈비뼈가 부러지고 어떤 사람은 피가 낭자하게 흘렀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처럼 윗사람을 범하고 분수를 넘어선 변고는 보지 못했다. 이 포옹일기를 쓴 최진익은 한미하지만 어쨌건 양반 후손이고, 산송이 일어난 상대는 역졸인 최한석이다. 역.. 2026. 7. 24. 이전 1 ··· 11 12 13 14 15 16 17 ··· 103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