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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적, 족보, 일기 이야기 (역사인구학)587

선물경제는 물물교환을 폼나게 이른 것 선물경제라는 말이 있다. 이 용어가 나온 것은 필자가 보기엔 전적으로 조선시대 당시 일기 때문이다. 임란 전후하여 나온 일기를 보면 선물 주고받는 일을 꼼꼼이 적어둔다. 이 시대 선물이라는 것은 요즘처럼 귀한 물건주고 받는 것이 아니다. 선물을 보면 말린 꿩, 말린 조기, 쌀 한말, 노루 뒷다리 말린것, 말린 전복, 미역 등등 아무리 높은 이가 준 선물도 모두 이렇다. 쉽게 말해 생필품을 선물로 주고 받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선물 종류는 매우 제한적이어서, 주고 받은 선물을 따로 추려 보면그 종류가 몇 가지 안 된다. 이렇게 몇 가지 안 되는 생필품을 선물로 주고받은 이유는이렇게 생필품 중 비교적 교환이 쉬운 물건을 주고받아야 이 물건의 가치가 얼마인지 알고 다음 번에 이에 해당하는 만큼 답례를 할 .. 2026. 7. 19.
나라가 망할 판인데 사족들 대책의 모호함 조선 중기에 들어서면이대로 가다가는 나라가 망한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온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율곡으로 그는 경장론이라는 것을 내는데, 이대로 가면 나라가 망할 판이니 활 줄을 새로 당기듯 새로 나라의 기강을 고쳐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구체적 방안을 보면 모호하기 짝이 없다. 예를 들어 보면 학업 성적이 안 나오는 학생에게처방으로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해결법을 내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공부를 열심히 안 해서 성적이 안 나오는 애한테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게 무슨 처방이 되겠는가. 물론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필자는 율곡이 구체적 방안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마 그 구체적 방안을 노출시키기에 앞서 지병으로 병사했다고 본다. 조선시대 중기에는 클리셰가 있다. 나라의 정치가 엉망이라고.. 2026. 7. 18.
노비사역의 경제학, 왜 이 제도가 유지되었는가? 앞에서도 이야기했 듯이 우리나라는 18세기 초반까지도 노비사역을 중심한 양반들의 대토지 경영이 나라의 생산력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광작이니 자본가적 차지농이니 하는 건 조선시대 호적 한 번 안 들쳐본 이들의 잠꼬대 같은 이야기일 뿐이요, 화폐경제는 조선시대 일기만 하나 제대로 들쳐봐도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은 다 알기 때문에 여기 적을 필요도 없다. 쉽게 말해 조선시대 자본주의 맹아론이나 이런 것은 논쟁거리도 안 된다는 말이다. 일기와 호적만 들쳐봐도 분명한 일을 어거지로 부정하려다 보니 나오는 이야기일 뿐당시의 일차사료를 문맥 그대로만 읽어봐도 사실이 분명 명확하여 논쟁이고 나발이고도 없다는 말이다. 오히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도대체 왜 노비를 중심한 대토지 경영이.. 2026. 7. 18.
노비종모법을 왕에게 뒤집어 씌워버린 조선 사족들 노비제에 관련하여 원래 태종은 노비종부법을 주장하였지만 세종, 세조, 성종을 거치면서 노비종모법, 일천즉천으로 노비 숫자가 늘어나게 되었는데, 그 때문에 조선 내내 노비 숫자가 줄지 않고 전체 인구의 절반에 육박하게 되어버린 이유로 세종 세조 성종 등 당대의 임금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거니와, 과연 노비종모법 일천즉천을 이들 왕들이 무슨 이익이 된다고 주장했겠는가. 따지고 보면 이런 노비종모법 일천즉천을 과부개가금지 등과 묶어서조선전기의 유교 성리학적 세계관을 관철하는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로 보는 시각도 있던데 노비종모법 일천즉천은 성리학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고 유교하고도 아무 상관없는 제도다. 그리고 이 제도는 왕으로 대표되는 조선 정부의 입장에서 본다면 하등의 이익이 안 되는 것으로, 한 사람의 왕 .. 2026. 7. 18.
태종의 생각과 거꾸로 간 노비제 알다시피 고려시대에는 심지어는 왕족에도 적서차별이 심하였다. 서자로 태어나는 경우 왕족들도 머리 깎아 중을 만들어버리는 경우도 있었고, [그 반대도 있다. 있는 집안에서는 많은 아들 중 한 명은 거의가 출가했다. 이들은 금수저라 들어가면서 이미 고위 승직이 되었다.] 적자가 아닌 경우 확실히 정해진 안정적 신분이 주어지지 않았다. 앞에서도 한 번 쓴 것 같지만, 고려가 망할 때까지 국성인 왕씨가 조선 후기 국성인 이씨보다 그 숫자나 후손 세력이 훨씬 못한 것은 이런 이유가 크다 하겠다. 이 때문에 조선 건국과 함께 왕씨를 척결했다고 하지만, 그 숫자는 150명을 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고 보면 조선의 국성 이씨가 크게 떨친 데는 종친의 체계적 관리와 보호가 큰 역할을 했다 하겠다. 조선은 왕의 자손에게.. 2026. 7. 18.
왕안석을 두려워했을 율곡 언젠가 이야기했지만, 율곡의 경장론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은 이야기가 알려져 있다.우리 유학사에서 이 경장론을 역설하였던 사람으로는 조광조(趙光祖) 외에 이이(李珥)가 대표적인 인물이다.이이의 역사철학에 의하면, 역사의 모든 시기는 창업(創業)·수성(守成)·경장의 3기로 구분된다. 역사의 전개에서 일단 창업이 이루어지면, 그 혁명의 이념과 정신을 잘 보존하고 전수하는 수성의 시기가 오게 되고, 수성의 시기가 오래 지속하다 보면, 정신과 문물제도가 병들게 되는 시기가 필연적으로 오게 마련이다. 그런 경우에 경장을 해야 하는데, 경장할 때가 되어서 경장을 하지 못하면 나라에 큰 병폐가 생기게 된다고 말하였다.이런 역사관 속에서 그는 당시를 경장의 시대로 규정하고, 사회와 정치의 숙폐(宿弊)를 지양하고 새로운 .. 2026.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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