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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적, 족보, 일기 이야기 (역사인구학)504

무슨 수단을 써서도 양반으로 남아라 다산은 그 아들들에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서울 근처에 남아라, 라고 했다던가. 이는 다산의 시대에 경화사족들이 모여사는 서울을 떠나게 되면영영 제대로 된 양반으로 남기 힘든다는 현실에서 비롯된 고언일 것이다. 지방사족들은 반대로 18-19세기가 되면 몇몇 예외적 존재를 빼고는 죄다 개털이 되어 문반의 경우 급제를 하더라도 하급지위를 맴돌거나 대대로 문반의 지위를 누리던 이들도 간신히 무반 자리하나 얻어차고 양반 자리를 얻은 자가 많아졌으니 노상추일기 등에 나오는 영남소외론 등은 사실 영남만이 문제가 아니라 당시 지방 사족들은 죄다 개털이 되었다는 점에서 별 차이가 없었다고 해도 좋겠다. 지방사족들의 경우 서자는 물론 적자라도 대대로 벼슬이 끊어져 버린 집안들이 점점 늘게 되었는데 이들이 순순히 3대 벼.. 2025. 8. 24.
조선후기의 의례에 대하여 우리나라 조선후기의 국가 의례, 그리고 사대부 반가의 의례는모두 조선의 유학자들이 창안해 낸 것이다. 원래 무슨 유교경전에 자세히 기록된 것이 아니다.이것을 고례古禮라고 하는데, 고례는 유교경전 몇 군데에 매우 소략하게 산견될 뿐으로 이미 아주 옛날에 사라져버려 이름만 간신히 전하는 정도로그것이 어떻게 시행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따라서 친영례라던가 향음례, 향사례 등무릇 고례를 따라가야 한다고 조선후기에 시행한 수많은 의례는모두 다 유학자들 창안품이다. 물론 그 안에는 근거가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는 부분도 있는데그래 봐야 예기 등의 글 한쪼가리로 부풀려 만들어 놓은 거라근거라고 할 만한 부분도 전혀 없다. 사대부 반가의 의례로 내려오면 결국 주자가례인데,주자가례 자체가 고례와는 무관한 .. 2025. 8. 23.
대동보의 호황은 19세기 중반부터 우리나라 대동보 "산업"의 호황은 19세기 중반부터다. 왜냐. 호적을 보면 이때쯤이면 3-5명 정도의 사람들로 구성된 소농 가구가 동네마다 가득하여,이들이 죄다 유학을 칭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들이 유학을 칭한다는 건 자신들이 양반이라고 호적에 올렸다는 소리다. 양반이라고 호적에 올렸는데 족보가 없으면 되겠는가? 19세기 중반부터는 대동보가 초호황을 누리기 시작했음이 틀림없다. 이전까지는 족보라고 해 봐야 유력 가문 몇몇이 찍어 나눠 가지는 정도의, 아마도 잘해 봐야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사람의 문집이나 찍어 돌려보는 정도의 부수였을 텐데 19세기 중반 동네마다 유학을 모칭한 이들로 가득하니 우리나라 대동보 산업은 이때부터 초호황을 구가하여 그 흐름이 지금까지 이어졌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 시점에 양반.. 2025. 8. 23.
필사적인 양반 되기 우리나라는 원래 유교의 고례와는 거리가 먼 나라라 성리학이 들어오고 주자가례가 들어와도 원래의 풍습을 바꾸는데 꽤 오래 걸렸다. 이미 주자가례는 조선이 개국되던 시기에는 들어와 있었지만, 그대로 실천하기에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16세기나 되어야 주자가례 흉내라도 내게 된 것이니, 밥만 먹으면 사서집주 읽고 주자가례 들춰보던 양반들이 가례 따라 움직이는데 무려 200년이 넘게 걸린 것이다. 그런데, 18세기까지도 전 국민 절반이 노비로 아마도 그 중 대다수는 제사를 지냈을 리도 없고, 족보도 없었을 나라에서 불과 백여년 만에 집집마다 제사를 지내고 양반 족보 없는 집이 없게 되었다. 놀랍지 않은가?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양반들도 200년 걸린 풍속을노비출신이었던 사람들까지도 짧은 시간에 집집마다 제사를 .. 2025. 8. 23.
전국에 흩어진 노비와 토지 앞서 김 단장께서 조선시대 전국에 흩어진 양반의 노비와 토지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이 부분에 대해 부연한다. 쇄미록에도 이 이야기는 절절히 나오는 바, 가 본 적도 없는 노비에게서 신공을 받기 위해 사람을 보내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온다. 신공이라고 해 봐야 신통치 않다. 딱히 경제적인 득을 얻기 위해서라기 보다상징적인 신공을 받아 주종관계를 확인하기 위한 정도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아마 이들은 19세기가 되면 자연해체되어 외거노비와 주인 관계가 망각되고 모두 소농으로 독립해 나갔을 것이다. 이들 중 일부는 유학호를 취득하여 양반으로 진입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처럼 전국에 흩어진 노비와 토지가 성립된 것은필자가 보기엔 조선 건국이 고려시대 대규모 장원을 규제하며 넓은 곳에 직접된 농장을 불온.. 2025. 8. 22.
그 다음은 설명이 없는 한국사 우리나라 역사 설명을 보면 이렇다. 안 그렇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필자가 보는 한국사의 개략이다. 개항 이전까지 조선의 변화에 대해 설명한다. 물론 자본주의 맹아도 있고, 근대의 여명기 설명도 있다. 조선사회가 어떻게 변해갔는지 설명도 있다. 그러다가 개항기부터 해방 때까지거의 100년 가까운 세월 동안은오로지 식민지 독립운동 이야기만 하다 보니 그 이전까지 설명하던 사회 변화는 어찌 되었는지, 자본주의 맹아는 어찌 되었고 근대의 여명기라더니 그건 그 다음 스토리는 어찌 되었는지설명이 싹 사라지고 오로지 일제의 수탈과 독립운동 이야기만 한다. 그러다 해방이 되니 거의 100년 동안무려 3세대에 걸친 사람들이 도대체 어떻게 살았고한국사회의 변화가 그 동안에는 어떻게 되었는지제대로 설명도 안 하.. 2025.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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