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분류 전체보기20046

[슈겐도와 일본 미라 이야기] (번외 7): 녹명관鹿鳴館시대 일본 메이지 시대에 지은 건물로 녹명관이라는 것이 있다. 일본어로는 로쿠메이칸이라 읽는다. 에도성에서 도쿠가와가 쫒겨 난 후 덴노가 쿄토에서 쇼군이 살던 성으로 옮겨 앉으니 그것이 바로 지금의 일본 황거(皇居, 고쿄)이다. 일본은 개항이후 서구 제국들과 불평등조약을 맺고 있었는데 1880년대까지도 여전히 그러했다. 일본은 조선에 무력으로 개입한 청일전쟁 시기까지도 여전히 서양 세력과는 불평등조약이었고이 조약은 최종적으로 러일전쟁 이후가 되어서야 완전히 개정되어 사라졌다. 아무튼 1880년대에 일본은 불평등조약 개정을 위해 일본이 서양 못지 않은 문명국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덴노가 사는 동경의 궁성 옆에 외국 빈객을 접대하기 위한 서양식 건물을 짓는데이것이 바로 녹명관, 로쿠메이칸이다. 녹명관을 기점으.. 2025. 1. 26.
[슈겐도와 일본 미라 이야기] (23): 신불분리와 슈겐도의 수난 폐불운동은 사실 일본만이 아니라 동양사에서 여러 차례가 있었다.중국에서도 전국적으로 광풍이 몰아친 유명한 폐불운동이 두어 차례 있었고, 한국도 조선왕조의 건국 자체가 일종의 폐불운동이라 할 수 있겠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은 불교전래 후 불교의 재래종교에 대한 우위가 결정되면서오랫동안 불교를 주, 토착신앙을 종으로 하는 신불습합이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러한 상황이 에도시대 국학연구가 활발해지면서 변하기 시작하였다는 말을 하였다. 그리고 메이지 유신이 일어난 후, 결국 신정부는 신도와 불교를 나누어 구분하는 신불분리神仏分離 정책을 선언하게 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의 신사와 불교사원의 모습은 따라서 메이지유신 이후에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메이지신정부는 불교와 신도가 뒤섞인 사원에서 불교.. 2025. 1. 26.
[슈겐도와 일본 미라 이야기] (22): 신불습합과 슈겐도 신불습합이라 하니 어마어마해 보이지만 사실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도 절에는 도교 전통에서 유래하는 칠성각이나 산신각이 있다.정통불교에서 다루지 않는 신앙의 대상이 불교에 포섭되어 숭배된다면 그것도 일종의 신불습합이라 볼 수 있겠다.그리스도교가 전래된 유럽에서도 기독교 전래 행사에 전래 이전의 풍습이 포섭된 흔적을 볼 수 있는데예를 들어 크리스마스의 기원은 예수탄생보다 훨씬 그 기원이 거슬러 올라가는, 이교도적인 그 무엇이 모습을 바꾼 것이라는 주장-. 이것도 유럽판 신불습합이라 할 수 있겠다. 일본사에서 백제로부터 불교가 전래된 초기,불교를 믿을 것인가 말것인가 하는데 대한 논의에서소가씨가 불교의 수용을 권한 데 반해 불교를 배척한 物部씨와 中臣씨는일본에는 고유한 수많은 신이 있는데 외국의 신을 숭.. 2025. 1. 26.
[사금갑射琴匣을 심판한다](3) 반딧불 정신 팔려 모두가 놓쳐버린 번갯불 앞서 본 대로 삼국유사는 사금갑 사건을 통해 폭로된 내전內殿, 곧 왕실을 드나드는 승려 일종인 분수승焚修僧과 스캔들을 일으킨 왕실 여인을 궁주宮主라 했거니와그렇다면 궁주란 무엇인가? 저 삼국유사를 역주한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아래와 같은 주석을 댔다. 왕비보다 격이 낮은 왕의 첩이다. 신라의 후비제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으나, 고려사 권88 후비전의 내용을 참고할 수 있다.실제 고려시대 궁주가 사용된 맥락을 보면, 시대별 차이는 있지마는 근간에서 궁주는 후궁 중 하나다. 후궁들도 등급이 있어 제법 높은 축 후궁은 궁宮이라는 궁궐 거주공간을 배정받았고, 그 바로 아래 후궁들은 원院이라는 거주공간이 할당됐다. 이 궁에 거주하는 후궁을 궁주라 하고, 원에 거주하는 후궁을 원주院主라 했다. 한데 삼국사절요와 동국.. 2025. 1. 26.
불교에 되치기 당한 박연암[2] 신흥사 중들한테 쫓겨나고 연암집 제3권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가 수록한 박지원 공문서 중에는 그가 양양부사 재직 시절 직속 상관인 강원도순찰사한테 올리는 글이 있으니 연보에 따르면 그가 양양부사가 된 시점은 1800년, 64세 때라, 그해 6월에 정조가 승하하고 두 달 뒤인 8월에 양양부사가 되었거니와 이 글은 부사 취임 100일이 지난 새해에 올린 문서라 하니, 순조 1년, 1801년 새해 벽두임을 추찰한다. 이에서 연암은 관내 신흥사가 각종 불법을 자행하고 있지만, 그것을 제어해야 할 상부, 특히 강원감영과 중앙정부가 미온적으로 대처하는 데서 한 발 더 나아가 그들을 두둔하고 있다면서 그것이 불합리하다는 감정을 격정적으로 토로한다. 지금 예조의 관문關文에 “신흥사神興寺의 잡역을 경감한 뒤로 종이에 먹도 마르기도 전에 불법 징수.. 2025. 1. 26.
50년전 100년전 글을 인용하는 한국학계 100년 전, 50년전 글을 참고문헌으로 다는 작태는 그만 해야 한다.한국 고대사를 보면 아직도 이 짓거리를 일삼는다. (2016. 1. 26)***아직도 금서룡今西龍 이병도가 참고인용문헌에 오르는 일을 어찌 봐야 할지 모르겠다.얼마나 연구에 진전이 없으면 백년 전 이마니시 류 글이 인용문헌에 오른단 말인가?도대체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데 여직 금서 이병도 주변을 얼쩡인단 말인가?백년전 오십년전 글은 참고인용문헌이 아니라 이른바 원전이다.어느 시대인데 고릿적 글을 끄집어 내어 그 가부를 논한단 말인가? 2025. 1. 26.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