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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 노동, 그 현장 조카딸 아들놈이 어김없이 왕할매 고구마 밭 노동현장으로 출동해 지 할매 엄마랑 열심히 고구마를 캔다. 웃겨 죽겠다. 농사꾼 기질 다분한데 키워봐? 손주들 보는 재미야 재롱 아니겠는가? 오늘도 너 때문에 내가 배꼽잡는다. 2024. 10. 8.
대학에 남으면 안되는 이들 필자가 대학 밥을 먹다 보니 내린 나름의 결론은 대학은 머리 좋은 사람들보다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이 남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머리가 아무리 좋아도 그건 다 아는 거고 원래 다 알던 거고 그게 왜 궁금하냐고 하는 사람들은 대개 얼마 안 되서 연구는 제쳐두고 바깥으로 나도는 꼴을 수도 없이 봤다. 하지만 자기가 하는 일을 좋아하고 이것저것 궁금해 하는 사람들, 궁금하면 끝장을 봐야 하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어쨌건 죽이 되건 밥이 되건 자기가 택한 주제를 끝까지 파들어가고, 나이 지긋해지면 그래도 일생 동안 판 주제로 책 몇 권이라도 남기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대학은 머리 좋은 사람보다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이 남아야 한다. 공부에 관심이 없고 도통 궁금한 게 없다면 대학은 남아서는 안 된다. 2024. 10. 8.
조선시대 은비녀 조선시대 살인사건이 일어나면 독물중독으로 죽었는지 판정하는 방법 중 현장에서 가장 많이 쓴 방법이 은비녀를 쓴 방식이다. 원래 무원록 등지에는 이 방법 말고도 사망자 입에 밥을 넣어놓았다가 그 밥을 빼내어 닭을 줘서 먹게 한 후 죽는가를 보는 방법도 있었는데 번거롭기도 하고 중독된 닭을 먹고 사람이 죽는 경우가 나와서 이 방법은 영조 대 이후 안 쓰게 되었다고 한다. 은비녀는 사용법이 간단하다. 입과 항문에 넣어서 색이 변하면 독물 중독으로 판정한다는 것인데, 문제는 현대과학으로 볼 때 모든 종류의 "독물"에 색이 다 변하는가 하는 게 문제겠다. 조선시대에 독약으로 많이 쓰던 비상의 경우 화합물에 함유된 황화수소가 은과 반응을 일으켜 실제로 색이 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자살용으로 .. 2024. 10. 8.
불구대천不俱戴天한 혜석惠石 조동윤趙東潤(1871~1923) 미술사가 오주석(1956~2005) 선생의 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오주석 선생이 간송미술관에 근무할 때, 채색된 난초 그림을 보았단다. "무슨 난이 이렇게 기름지단 말인가?" 그러다 옆에 붙은 화제를 읽고 고개를 끄덕였단다. 그 주인의 친일 행적 때문에. 그 '기름진 난'을 그린 이가 바로 혜석惠石 조동윤趙東潤(1871~1923)이다. 조동윤은 풍양조씨로, 그 유명한 신정왕후 조대비(1809~1890)가 고모할머니뻘이 된다. 그의 부친 혜인惠人 조영하(趙寧夏, 1845~1884)는 조대비의 5촌 조카로, 흥선대원군(1820~1898)과 친해 고종 등극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10년 만에 대원군과 척을 지고 그 세력을 몰아내는 데 힘을 보탠다. 그래서 정권이 바뀌었음에도 여전히 출세가도를 달렸다. 하.. 2024. 10. 7.
봉건적 학문의 잔재, 그리고 노벨상 일본 학문의 원형은 분명히 한반도에서, 중국에서 전해진 것이지만, 20세기 이전 동아시아-. 근대적 의미에서의 학자와 학문의 탄생은 에도시대 일본 외에는 없다. 동 시기 조선의 소위 "학자"들은 지금 한국의 근대적 학문 전통으로 이어져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그 "봉건적 학문의 잔재"를 완전히 척결 못하고 온 결과가 바로 아직도 한국 대학을 유령처럼 배회하는 "현실참여에의 강박"이다. 왜 한국의 학자들이 "현실참여에의 강박"을 가지고 끊임없이 정계 진출을 노리다 그 욕망이 충족되면 다시 학교나 학문으로 돌아와 학자 코스프레를 하다가 죽음을 맞는가. 한국의 학자들은 조선 유학자들의 정신적 후예이기 때문이다. 이 잔재가 우리나라 대학에서는 완전히 척결되었어야 했는데 불행히도 그렇지 못했다. 이 잔.. 2024. 10. 7.
오늘 열 번도 더 들은 말 나이 들어 체중 감량은 여러 모로 불편하다. 그래 요즘 이 상황에서 조금만 속이 더부룩하거나 며칠을 먹어대서 배가 불룩하면 참을 수 없을 만치 고통스럽기는 하다만 이왕 빠질 거라면 조금씩 빠졌으면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회사를 그만 둘 무렵 이미 체중은 평소 그에 견주어 5~6킬로그램이 감량한 상태였으니 그에다 근자에는 연이은 요절복통과 다리 부상 사태 여파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아니라 해도 그만둘 무렵보다 더 빠졌음을 실감한다. 체중이 60킬로그람대로 내려가고선 저울에 올라가지 않는다. 오늘 어떤 자리 갔다가 열 명도 넘는 사람한테도 같은 말을 들었다. 왜 그리 살이 빠졌냐고. 종래 같으면야 그런 말들에 스스로 기뻐했겠지만 요새 저런 말이 미쁘지는 아니한다. 아테나이 가서 좀 찌우고 와야겠다... 2024.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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