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분류 전체보기21001 소작제가 조선사회의 주류가 된 시기 필자가 19세기 조선의 상황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목하 진행 중인 조선시대 검안 서류에 대한 의학적 검토 과정에서, 해당 사망 사건의 배경 설명에 그 당시 상황에 대한 이해 없이는 어려운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검안 서류에 나타난 19세기 말의 상황을 보면이미 조선의 향촌에는 노비가 거의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물론 마을에서 양반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는데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사건에서어떤 이가 양반이라던가, 평민이라던가 하는 문제는 사건의 전개와 판결 과정에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는 양반이라 해서 경제적 처지가 평민보다 반드시 낫지 않았던 데 이유가 있다고 본다. 쉽게 말해 필자가 보는 바 19세기 말 상황은 20세기 초반과 별로 다르지 않은 상태로서 이미 노비.. 2025. 8. 18. 실학은 근대의 선구가 아니다 필자가 이 블로그에서 여러 번 썼지만우리나라 실학은 근대의 선구가 아니다. 전혀 아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실학을 근대의 선구로 자리매김했는지 모르겠지만이들은 딛고 있는 사회적 기반도 그렇고그 이데올로기 자체도 근대와는 관련이 없다.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실학을 근대의 선구로 자리 매김한 것은 이 시기를 자본주의 맹아, 근대의 맹아의 시점으로 보고, 광작운동, 자본가적 차지농 등 내재적 발전의 시점으로 설정해 놨기 때문에그에 걸맞는 근대적 사상의 단초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학을 근대의 선구로 둔갑시켜 장식해 놓은 것이다. 필자가 여기에 여러 번 글을 썼듯이필자는 근대의 선구는가짜양반들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이 실제로 근대의 문을 열어젖혀야 했을 사람들인데이 계층 자체가 성립된 시기가 너무 늦어19.. 2025. 8. 18. 몰락양반과 가짜양반 19세기 조선사회. 마을마다 유학을 칭하는 양반호가 압도적인 숫자가 되어 있었고이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몰락양반"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몰락양반"이 그렇게 흔했을까? 조선시대에 가지고 있던 재산 관리를 못하고 벼슬도 떨어져 양반이었던 사람들이 양반이 아닌 처지로 굴러 떨어진 상황이 꽤 많았을 듯하지만, 호적을 보면, 그렇지 않다. 양반 자손들은 아무리 살림이 어렵고벼슬을 하지 못해 부, 조부, 증조부 직역이 학생이 되어 있어도여전히 호적상에서는 양반호로 잡혀 있었다. 몰락양반이란 것이 우리 생각처럼 그렇게 간단히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조선의 19세기에 늘어났다는 소위 "잔반"혹은 "몰락양반"이란, 원래 양반이 아니었던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몰락양반"이라 주장하는 사람 상당.. 2025. 8. 18. 구한말의 주인공은 노비 후손이다? 필자는 이 말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도발적인 말을 하는 이유는 이렇다. 18세기 초반까지도 마을마다 절반 가까이 되던 노비사역이 18세가 후반을 거쳐 19세기가 되면 거의 사라지고 각 마을은 자기들이 양반 후손이라 주장하는 소농민들로 재편된다. 그렇다면 이전 노비는 어디로 갔겠는가, 당연히 양반이라고 주장하는 소농민들로 바뀌었을 것이다. 이 숫자가 전체 인구의 절반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과연 19세기 후반, 구한말에 들어가면 얌전히 있었을 것으로 보는가? 19세기 후반 활동하던 사람들 상당수, 심지어는 중앙정부에 발탁되어 들어간 사람들 중에도 이들이 상당수 섞여 있었으리라 보는것이 옳지 않을까. 당연히 우리나라 역사에서 구한말 활동하던 사람들 중에는 우리 조상이 100.. 2025. 8. 18. 임시정부를 지탱한 살림꾼 한진교 패망 뒤 중국 망명, 회사 설립해 언제나 임정 자금책해방 뒤 귀국해 한경직 목사와 영락교회 창설, 한태동 선생 선친 어느 기관이나 조직이든 실제로 운영을 하는 데에는 살림꾼이 필요한 법이다. 26년이나 존속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그러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중 한 명이 평안남도 중화 출신 독립운동가 한진교韓鎭敎(1887~1973)다. 일찍이 개신교에 입교하고 평소 정의감이 남달랐던 한진교는 망국 이후 베이징으로 망명했다가 1914년 상하이로 가서 해송양행海松洋行이라는 회사를 설립하여 경영했던 인물이다.그곳에서 나온 수익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헌납했으며, 이를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될 수 있었다.1918년에는 청년 독립운동단체인 신한청년당 창립 멤버로 참여했다. 한진교를 포함한 6인 창당 멤버는.. 2025. 8. 18. 성경시대 증언할 수도 있는 점토 봉니 발굴 고대 인장 발견, 성경 시대와 연결고고학자들이 요시야Josiah 왕의 궁정에 살던 성경 속 인물과 관련될 수 있는 히브리어 명문을 새긴 놀라운 점토 인장clay seal impression 1점을 발굴했다. 성전산 시프팅 프로젝트Temple Mount Sifting Project를 통해 발견된 이 유물에는 "아사야후의 아들 예다야Yeda'yah (son of) Asayahu"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제1성전 시대First Temple period 후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 희귀한 발견은 고고학적 증거와 고대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시대 중 하나인 성경 이야기 사이의 실질적인 연결 고리를 제시한다. 불라bulla로 알려진 이 인장은 20년이 넘는 꼼꼼한 작업 끝에 이 프로젝트를 통해 발견된 거의 완전.. 2025. 8. 18. 이전 1 ··· 70 71 72 73 74 75 76 ··· 3501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