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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주대첩] (12) 넘쳐나는 과부와 고아 이른바 제3차 고려거란전쟁이 거란에 준 충격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이었다. 이 전쟁은 공식으로는 1019년, 개태開泰 8년 2월에 종식되었지만, 그 수습은 그해 내내 계속됐다. 그해 3월, 수뇌진을 처벌한 거란 성종 야율륭서는 그해 6월 무자戊子에는 고려를 정벌할 때 전몰한 장교의 자제들을 조사한 데 이어 그달 을사乙巳에는 남피실군교南皮室軍校 등이 고려를 토벌한 공이 있다 해서 금백金帛을 차등 있게 하사했다. (요사 성종본기) 이것으로 부족하다 생각했음인지 같은해 가을 7월 기미己米에는 고려를 정벌하다 전몰한 여러 장수의 처한테 조칙을 내려 봉록을 더해주게끔 한다. (요사 성종본기) 물론 이 전쟁이 참혹한 거란의 패배로 끝났지만, 그렇다 해서 아주 그들로서는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닐 테지만, 그것을 감출.. 2024. 2. 24.
[귀주대첩] (11) 대패한 소배압을 용서할 수밖에 없는 야율륭서 앞서 본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제3차 고려거란전쟁 전황을 주요 전투 장면을 시간순서대로 잘 정리했다. 이를 다시금 상기하면 고려 현종 9년, 1018년 12월 10일 거란군은 흥화진에서의 서전 이래 대략 3개월을 곳곳에서 판판이 깨지다가 이듬해 2월 1일 귀환 길목 귀주에서 대패하고 군사 대부분을 읽고서 수뇌부 몇 명을 포함한 일부가 겨우 목숨을 건져 달아났다. 한데 이 전투 사정이 요사 遼史 성종聖宗 본기에서는 개태開泰 7년, 1019년 12월에 날짜를 특기하지 아니한 채 한 순간 전투에서 대패한 것으로만 적었을 뿐이다. 고려 쪽 기록과 비교할 때 요사 쪽에서는 거란군 패전을 부러 축소하려 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럴 수밖에 없잖은가? 전쟁에서 진 일이, 더구나 한참 아래로 본 고려한테 개발살난 일이 무.. 2024. 2. 23.
[국내 박물관 현황과 연혁] 예천박물관 간평 : 이 예천박물관이 보유한 특징 혹은 특장이라 할 만한 내용은 이전에 아래와 같이 지적한 적 있으니 그것으로 갈음한다. (맨아래 첨부 기사 참조) 한국사회에서 지역박물관 공립박물관이 살아남을 고리는 결국 학연지연혈연이다. 예천박물관 이 버티는 힘이 바로 이것이다. 간단하다. 잘난 가문 잘났다고 현창해 주자. 그 잘났다는 가문을 현창해 주었는데, 그 가문 구성원이 그 박물관 없애라는 소리 하겠는가? 이 박물관은 애초 출발 자체도 가문현창이라는 색채가 아주 강하다. 2010년 5월 11일 '예천충효관'으로 개관한 이곳은 2015년 12월 29일 박물관으로 승격하고 빗물 줄줄 새는 건물을 리모델링하고는 2021년 2월 22일 '예천박물관'이라는 간판을 새로 달았다. ■ 연혁 2010. 05. 11. 충효.. 2024. 2. 23.
[귀주대첩] (10) “도통은 소배압, 부통은 소허열” 지금까지 본 전쟁은 고려사랑 고려사절요와 같은 고려 측 기록(더 정확히는 그것을 정리한 조선초 이데올로기)이며, 이 전쟁이 거란 쪽에서는 어찌 기억되었을까? 그 흔적은 요사遼史 성종본기聖宗本紀와 이 전쟁에 종군한 사람들 열전에 남았으니 이를 살펴야 한다. 이 전쟁이 요사에서는 권16 본기 제16 성종聖宗7에 남았다. 이 전쟁을 일으킨 1018년, 고려 현종 9년은 거란으로서는 개태開泰 7년이라, 이해 3월 신축辛丑에 동북쪽 월리독越里篤과 부아리剖阿里·오리미奧裏米·포노리蒲奴里·철려鐵驪 등 5개 부部에 대해 세공歲貢으로 초피貂皮 6만5천 장과 말 300마리를 바치게 했다 하는데, 내가 아무리 봐도 이는 그 연말에 있을 고려 정벌을 염두에 둔 듯하다. 저들 5개 부는 동북쪽이라는 위치를 특정하는 것으로 봐도 .. 2024. 2. 23.
대동여지도는 실측지도가 아니다 일본에는 대동여지도보다 빠른 시대에 만들어진 대일본연해여지전도 大日本沿海輿地全図 라는 지도가 있다. 막부의 주선으로 伊能忠敬라는 인물이 만든 지도로 정밀도도 대동여지도보다 높고 무엇보다 이 지도는 해안선을 서양지도 제작법을 적용하여 "실제로 측정하여 만든" 실측지도이다. 문제는-. 대동여지도는 실측지도가 아닌 것 같다는 점이다. 이건 직접 측량한 지도가 아니다. 大日本沿海輿地全図 처럼 실측지도라면 해안선이 실제와 비슷한 것은 놀라운 점이 아니고 그 제작 기술도 서양의 지도 제작법을 따라 올라가면 되기 때문에 이해가 어렵지 않다. 대동여지도의 해안선 제작법이 그래서 궁금한 것이다. 대동여지도가 실측지도가 아니라면 한반도 해안선을 어떻게 유추해 냈을까? 이게 지금 돌아다니는 이야기처럼 "발로 전국을 훑었다던.. 2024. 2. 23.
[귀주대첩] (9) “네 낯 가죽을 벗겨 죽이리라” 앞서 봤듯이 거란군은 흥화진 전투에서 대패했음에도 냅다 개경을 향해 남하했다. 심지어 서경도 오른편으로 돌린 채 남하했다. 이는 소배압 전술이 현종 사로잡기였음을 폭로한다. 하지만 십만 거란군에 견주어 이십만을 동원한 고려군은 전력에 여유가 있었다. 일부는 거란군 꽁무니를 맹렬히 좇아 따라붙어 후미에서 들이쳤다. 강감찬은 그러는 한편 일부 부대는 빼돌려서 개경으로 서둘러 내려가게 했다. (1019년) 봄 정월 경신, 강감찬은 거란 병사들이 도성 가까이에 이르자 병마판관兵馬判官 김종현金宗鉉을 보내어 병사 10,000명을 거느리고 길을 서둘러 가서 경성으로 들어가 호위하게 하였다.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 또한 병사 3,300명을 보내어 지원하였다. (고려사절요) 소배압은 쏜살같이 달렸다. 1월 3일에 벌써 .. 2024.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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