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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에 드리는 고언: 논문의 길이 필자는 인문학자가 아니라 이를 고언이라 포장한다 해도 역시 조심스럽다. 다만 평소 느끼던 일을 좀 적어둔다. 문외한의 헛소리라고 볼 일인지 한 번 고려해 볼 만한 일인지는 인문학자들 몫이다. 여기서 쓰고 싶은 이야기는 우리나라 인문학관련 학술지의 경우 논문의 길이가 획일적으로 너무 길다. 학계에 보고하는 것은 장편도 있지만 단편도 있어야 하고 아이디어에 따라서는 4페이지를 넘지 않기도 한다. 이를 이유 막론하고 장편 논문만 실어서는 그런 빛나는 아이디어는 전부 사장되고 이 때문에 "원래 알던 건데.."라는 말이 학계에 횡행하게 되는 것이다. 짧은 논문만으로 채우는 학술지가 나와도 되고 (총4페이지 이내) 학술지에 일정 부분을 짧은 논문으로 채워도 된다. 어느 쪽도 상관 없는데, 짧은 논문은 반드시 두어야.. 2024. 2. 13.
1925년 풍납토성을 답사한 일본 인류학자 기요노 겐지[清野謙次] 일본의 저명한 형질인류학자로 기요노 겐지라는 인물이 있다. 청야겸차 清野謙次 라 쓴다. 1885년에 태어나 1955년에 사망했다. 교토제국대학 출신으로 독일 유학 뒤에 귀국해서 모교인 교토제국대학 교수가 되어 활동하면서 일본인은 아이누 후손이라는 주장을 부정하고 일본인 독자 형성론 혹은 혼혈론으로 주창해 열렬한 칭송을 받았다. 수집벽이 정신병적이라, 사찰 보물을 훔쳐내다가 잡혀서 유죄판결을 받아 면직되는가 하면, 이 사태로 당시 교토제국대 총장이면서 한국고고학계 일각에서는 여전히 신화적 인물로 추앙하는 하마다 코사쿠 빈전경작 濱田耕作 이 사임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 친구가 길러낸 제자 중에 731부대장이 있어, 이런 인연을 발판으로 생체실험에 깊이 간여한다. 전후 처리에 미국과 일본의 밀약으로 극적으로.. 2024. 2. 13.
AI로 복원한 도산 춘원 민세 단재 나혜석 AI 증폭 기술을 이용해 저화질 구린 서비스 사진 서비스가 이뤄지는 근세기 안재홍 안창호 이광수 박한영 신채호 나혜석 을 증폭해 봤다. 다른 데서는 문제가 안 생기는데 나혜석 할매는 얼굴 그림자를 수염으로 인식한다. 저런 건 후손질 포토샵을 활용해야 한다. 나머지는 그냥 써먹어도 왜곡 논란이 없을 정도로 완벽하다. 2024. 2. 13.
[문화재 기자 17년] (2) 사천성 대지진과 도강언 2008년 중국 사천성이 무너졌다. 이해 5월 12일 오후 2시28분에 발생한 리히터 규모 8.0의 대지진 희생자는 사망자가 약 6만9천 명이요 부상자가 약 37만4천 명, 행방불명자가 약 1만8천 명에 붕괴 가옥은 21만6천 동이라 하니 미증유의 재앙이었다. 내 기억에 구조 활동에는 한국 사람들도 깊숙이 관여했으며, 그 직후 중국을 방문한 한국 대통령 이명박은 현지를 찾아 구조활동을 응원하기도 했다. 이런 자연의 대참사에는 으레 그 흥분이 조금은 가라앉을 즈음에는 문화재 피해 상황에 대한 후속보도가 따르기 마련이다. 아니나 다를까 사건 발생 얼마 뒤 문화재 역시 피해가 적지 않다는 외신 인용 보도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개중 내 기억에 가장 생생한 문화재 피해 현장이 도강언都江堰이라는 곳이었다. 전국시대.. 2024. 2. 13.
일본어 출판에 대한 생각 최근 필자가 연구를 정리하는 작업을 하면서 영어권과 일본어 출판을 함께 병행하고 있는데 일본어 출판의 경우 출판 후에도 도서관에 거의 잡히지가 않아서 출판과 동시에 원고가 고립되어 사장되어 버리는 듯한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반면 영어권 출판은 아무리 작은 출판사에서 출판해도 전 세계에 출판 당일 온라인 서점에 정보가 뜨며 몇 달이면 서울대 도서관에도 그 정보가 나타나서 E book을 제공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일본어 출판의 경우 한국어 출판과 큰 차이가 없다고 보이므로 비영어권 출판은 한국어 출판의 편이 더 낫지 않을까 하며 무조건 학술출판의 최종형태는 영문 출판으로 가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한국어와 일본어 출판은 현재로서는 그 자체 출판과 함께 고립을 면하기 어렵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2024. 2. 13.
왕가도, 거란 선제공격을 주장한 매파(2-2) 두 건의 찬반투표 현종이 죽고 그의 아들 덕종德宗이 재위하던 시절 이야기다. 왕가도는 덕종의 장인이기도 하다. 덕종이 칭제하기 시작한 그 원년 1031년 6월 3일, 내내 고려와는 문제를 일으킨 거란 6대 황제 성종聖宗이 사망하고 그 아들 야율종진耶律宗眞이 즉위하니 이가 7대 황제 흥종興宗이다. 종주국으로 섬기는 왕조 황제가 사망했으니 공식 사절 조문단을 파견해야 했다. 그 소임을 공부낭중工部郞中 유교柳喬와 낭중郞中 김행공金行恭이 뽑혀 가게 됐다. 한데 거란 내부에 문제가 생겼다. 이를 틈타 부마駙馬 필제匹梯가 동경東京을 근거지로 삼아 난을 일으킨 것이다. 이 사태를 어찌 할 것인가? 이때 왕가도는 대 거란 강경파 선두주자에 서서 “거란은 우리와 우호를 맺고 예물도 교환하지만 매번 우리를 집어삼키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2024.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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