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곬생애
내 나이 이미 여든이 훨씬 넘어 아흔을 바라본다. 단순히 시간의 뜻으로 보면 80여년이라는 세월은 그리 오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구한국시대에 태어나 온갖 역사의 비바람 속을 헤쳐 오늘에 이른 우리 또래의 사람들에게는 지나간 80여 년이 자못 힘겹고 오랜 세월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외람된 얘기 같지만 대한제국, 일제 35년, 미군정, 자유당 정권, 민주당 정권, 5․16혁명과 공화당 정권을 차례로 겪어야만 했던 세월이다. 또 역사상 미증유(未曾有)의 양차 세계대전을 직접 간접으로 받는 세상에서 살아왔다. 그뿐 아니라 6․25사변 같은 참혹한 집안 싸움도 견디어내야 했다. 이렇게 끊임없이 어지러운 사회 속에서 살면서 겪어야 했던 갖가지 경험이야말로 평화 시절 수백년간의 경험과 맞먹을 만하지 않겠는가.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같은 경험을 기록으로 남겼지만, 그 세월 속에서 내가 개인으로 겪었던 일들을 술회함으로써 뒷날 같은 길을 걸을 사람들에게 참고가 될 자료를 남긴다는 뜻으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나는 한평생을 외곬으로 국어학의 길을 걸어왔다. 서울대학교를 떠난 후 한 2년 동안 신문사에 몸담았던 외도(外道)를 제외하면 아직까지 그 길에서 벗어났던 일이 없다.
학문적인 체계도 서 있지 않았던 불모(不毛)의 시대에 국어학에 발을 들여놓은 지 50년. 반백 년 동안에 무슨 일을 했는지는 스스로 떠들 일이 아닌 줄을 알지만, 내 나름대로 억지 결산을 해 본다면 나는 우리나라 국어학의 이정표(里程標)에 머물지 않았나 생각한다. 국어학의 개설(槪說) 정도를 겨우 이룩한 셈이라고나 할까.
이정표는 사람들을 위해 방향과 거리를 알려줄 뿐, 자신은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는 돌멩이다. 50년을 바친 결과로는 너무 미미한 것이라 부끄러움이 앞선다. 좀더 정진했더라면 국어학의 어느 한 분야에 상당히 깊숙이 도달할 수 있었을 터인데 하는 후회도 든다.
자신있게 말하지만 나는 한번도 이 길을 택한 것을 후회한 일이 없다. 입신양명(立身揚名)하지 못했음을 아쉬워하지도 않는다. 내가 좋아 택한 길이었기에 나름대로 힘써온 것뿐이다. 살다 보니 사선(死線)을 넘은 것이 네댓 차례 된다. 지금의 여명(餘命)은 덤으로 얻었다는 생각이 들어 무엇 섭섭하고 안타까운 것이라곤 없다.
다시 태어난다면―만일 현재의 내 기질과 성격 그대로 다시 태어난다면 나는 또 이 길을 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직 우리 국어학은 더 많은 사람의 더 많은 품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희승, 《딸깍발이 선비의 일생― 일석 이희승 회고록 ―》, 창작과비평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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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일석만이 아니다. 조선시대 산림이니 해서 우리네 직업적 학문종사자가 언제나 권력을 탐한 듯하지만 꼭 그렇지도 아니해서 근대 이래 대개 연구자라면 작금의 연구자연한 사람들과는 달라 권력 주변을 기웃거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언제 연구자연하는 자들이 썩은 시체 매달리는 구데기떼마냥 권력 주변으로 개떼처럼 달려가기 시작했는가?
이승만 시대? 박정희시대? 교수가 느닷없이 발탁되어 장관이니 청와대 수석이 된 경우가 있는가? 있다면 몇인가? 없다 해도 좋다.
전두환? 마찬가지다.
이른바 민주화가 되기 시작한 노태우 이래 본격으로 권력지향 교수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김영삼 때 확대되더니, 김대중 노무현 정부 들어서는 아예 대기표 들고 기다리는 시대가 개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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