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2년 5세 풍월주 사다함 사망, 6세 풍월주 세종 취임
- 568년 원화源花 부활, 29년 만(540년 기준), 미실美室 원화 취임, 연호 대창大昌 개원
- 572년 홍제鴻濟 원년 3월, 동륜태자 보명궁 개한테 물려 사망, 미실 연루, 원화 4년 만에 폐지,
- 572년 풍월주 세종 재취임. 세종, 설원랑에게 풍월주 양위(양위연대는 불명, 아마 572일듯)
- 576년 진흥 사망, 진지 즉위와 더불어 화랑 분열, 호국선護國仙 문노파가 독립해 설원랑의 운상인파雲上人派와 대립
- 579년, 진지 폐위 직전 진흥왕비 사도태후가 두 파를 통합, 원화 부활, 미실 원화 재취임. 미실이 설원랑을 다시 풍월주로 임명, 곧이어 문노에게 풍월주 양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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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화랑세기에 보이는 진흥왕 말년과 진지왕 시대에 걸쳐 화랑에 일어난 혼란상의 간략한 연표식 정리다.
이걸 보면 왜 삼국사기가 진흥왕본기 말년 37년(576)에다가 화랑 창설과 그 이전 원화 운영을 종합해 배치했는지를 여실히 안다.
화랑은 풍월風月이라 이름한 교단 조직이었으며, 그 우두머리를 풍월주風月主라 해서 진흥왕 원년, 수렴청정을 하던 지소태후가 만들었으니, 그렇게 해서 운영하다가 29년 만인 568년, 그것이 폐지되고 그 뿌리인 원화源花가 부활하는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이 원화 역시 부작용이 적지 않아 폐지와 부활을 왔다리갔다리 하다가 나중에 화랑으로 정착하는 혼란이 있었다.
이 와중에 화랑이 두 파로 분열했으니, 하나가 무협 기질을 강조하는 문노파였고, 다른 하나가 기존 화랑 주류인 딩가딩가 도교 계열 설화랑파였다. 나중에 이 둘은 통합했다고 했지만, 두 파는 끝내 각자 영역을 지키면서도 같은 길을 가기는 했던 듯하다.
이걸 이해해야만 왜 김유신이 15살에 국선國仙이 되고, 18살에 화랑花郞이 되었는지를 비로소 이해한다. 김유신이야말로 두 파를 통합한 화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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